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달콤한 지 잘 알기에 그러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거의 여섯 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런데 지금 티 타임을 하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집에 와서 또 밥을 달라고 하면 귀찮겠다 싶었지만 차 한잔에 케이크나 빵 같은 걸 먹으면 배가 부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7시 반에 집에 돌아온 딸은 다행히 밥을 찾지 않았다.
며칠 뒤 둘째 딸이 제시카네서 슬립오버를 하기로 했다. 친구네 집에서 한 밤 자며 길게 놀다 오는 거라 잠옷이며 칫솔, 책, 인형 등 가방 한가득 짐을 챙겼다. 5시쯤 아이를 데려다주면서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시카 엄마와 한참 수다를 떨었다. 20분쯤 흘렀을까.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자, 이제 나는 아가씨들의 티를 만들러 들어가야겠어. 내일 봐!"
알았다 답하고 집에 돌아왔다.
영국 사람들은 차를 무척 좋아한다. 엄마들과 낮 시간 모임을 하면 나를 포함해서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커피를 마시는데 영국 사람들은 열에 대여섯은 차를 마신다. 영국의 차 문화 특히 에프터눈 티에 대해서는 이 나라에 오기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설탕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귀족들로부터 시작된 그들의 차 문화를 자세히 읽은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진짜 궁금했다. 일곱 살 아이들도 차를 좋아할까? 에프터눈의 시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지. 설마 카페인이 들어간 차를 주는 건 아니겠지? 5시에 차를 마시면 저녁은 따로 안 주겠거니 생각했다. 달달한 걸 좋아하는 둘째 딸은 티 타임을 하고 나면 저녁을 준다 해도 조금 먹을 게 뻔했다. 그런 거 안 먹이고 바로 식사를 주면 좋으련만.
"여보, 우리 집 딸들은 친구네서 밥도 못 얻어먹고 다니나 봐. 맨날 차만 얻어 마셔."
"그래? 배가 차는 간식을 주겠지."
"모르겠어. 나는 우리 집에 애들 놀러 오면 파스타도 하고 소시지롤도 직접 만들어 주는데... 좀 그렇네."
"영국 사람들이 차를 좋아하기는 하나보다."
나의 볼멘소리에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남편도 일손을 멈추고 화답했다. 그러고는 한참을 영국의 차 문화와 밥시간에까지 차를 주는 그들의 이질적인 문화에 대해 성토대회를 열였다. 위층에 있던 첫째 딸이 내려왔다. 잘됐다 싶어 바로 물어봤다.
"며칠 전에 루시네서 티 타임 때 뭐 먹었어? 빵 같은 거 먹었어?"
"티 타임이요? 아, 그날 저녁 때요? 고기 패티 구워서 햄버거 먹고 감자튀김 먹었는데요."
햄버거? 감자튀김?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차는 무슨 차 마셨어?"
"차는 안 마셨어요."
"티 마신다고 했잖아."
"뭘 마신다고는 안 했는데... 하여간 그게 저녁이에요. 여기서는 저녁식사를 티라고 불러요."
티가 저녁식사를 뜻한다고!? 왜 티가 저녁이냐고 다시 물었지만 딸은 장금이가 되어 티가 저녁이기 때문에 저녁이라 하는데 그게 왜 그러냐고 물으신다면... 하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영국 사람들끼리 그렇게 부르자고 약속한 것에 대해 '왜'냐고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딸은 디너도 저녁식사를 뜻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주로 티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티 이 에이. TEA. 이 세 글자는 진작 알고도 남은 단어였건만 그것이 차가 아닌 식사를 뜻한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남편과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우리 딸들이 친구네서 밥은 얻어먹고 다니는구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알고 보니 영국에서는 지역에 따라 저녁식사를 칭하는 게 제각각이다. 대략 영국 사람의 52%가 저녁을 티라고 부르며 37%는 디너, 5%는 서퍼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런던 근처 아래 지역으로 갈수록 저녁을 디너라 하고 위로 갈수록 티라 부르는 비율이 높다.
갈색이 진할 수록 저녁을 티라 부르는 비율이 높고 초록색이 진할 수록 디너라 부르는 비율이 높은 곳
영국에 산지 5년이 넘었건만 아직 이런 것 하나 몰랐다니. 다른 나라의 언어나 문화를 배우는 일은 책 한 권 읽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직접 부딪히며 실수하고 오해하며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제시카네 엄마에게 차 말고 밥을 주면 어떻냐고 묻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겼다. 외국 살면서 알아야 할 게 너무 많다는 사실에 좌절을 좀 할까 했다가 마음을 바꾸어 오늘 하나 배웠다는 것에 기쁨의 만세를 불렀다. 티는 저녁!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