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어디까지 가능할까. 그들의 관습, 취미, 생활방식, 전통, 행사, 기타 등등. 모든 것의 바탕에는 살아온 경험과 그것을 나누는 언어 같은 것들이 기본적으로 깔려야 완벽한 이해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처음에는 용감무쌍하게도 내가 이들의 문화를 다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같이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만약 여행을 하다가 잠깐 들른 곳에서 마을 축제를 맞닥뜨렸다면 한바탕 어울려 놀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겼을 거다. 참 조~은 구경했네, 이렇게도 사는구나 하면서. 그런데 마을 주민이 되어 해마다 맞이하는 이들의 축제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시간을 거슬러 3년 3개월 전, 두 딸들이 학교에서 통신문을 가져왔다. 마을 축제 <갈라 데이>에 참여하려면 신청서를 써오라는 공문이었다. <갈라 데이>는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하루짜리 마을 축제를 뜻한다. 우리 마을에서도 1년에 한 번씩 7월 초에 축제가 열린다.
뭐든지 열심이었던 나는 '우리도 이 동네 주민이 되긴 했구나' 싶은 마음에 딸들에게 참가를 권했다. 아이들은 축제 날 열리는 퍼레이드에서 각각 바우어 걸과 하얀 요정 역할을 맡았다. 처음엔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하고 넘겼다.
축제 전반을 담당했던 글렌다와 수잔은 기금 마련을 위해 다방면으로 홍보를 했고, 6월이 되자 매주 금요일마다 아이들과 함께 퍼레이드 연습을 했다. 그리고 축제날이 다가왔다. 화창한 날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주민들이 구경을 와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서로를 잘 알고 있는 터라 웃고 떠드는 통에 광장 전체가 들썩였다.
축제를 구경하러 모여든 마을 주민들
축제는 크게 두 가지의 이벤트가 있다. 하나는 여왕 대관식이고 하나는 마을을 돌며 여러 사람들이 퍼레이드를 하는 것이다. 대관식이 먼저 열린다. 마을의 여왕을 뽑는 행사다. 매년 동네에 사는 초등학교 7학년 여학생 중 한 명이 여왕으로 뽑힌다. 여왕은 준비위원회 차원에서 미리 내정되어 있다. 여왕이라고 해서 특별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고 축제 당일 대관식에 참여하며 내년에 있을 대관식에 참여해서 왕관을 건네주면 된다.
왼쪽 사진 - 2016년 마을 여왕 / 가운데 사진 - 2017년 여왕 / 오른쪽 사진 - 여왕 보위대
중학생이 된 전년도의 여왕도 다음 여왕에게 왕관과 봉을 건네주기 위해 대관식에 참가했다. 새로운 여왕이 호위를 받으며 입장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했다. 여왕이 된 아이들이 예뻤고 우리 딸과 같은 반 남자아이가 여왕 보위대를 맡아 킬트를 입고 나오니 학예회를 보는 것처럼 재밌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해가 바뀔수록 그들의 문화가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마을 행사에 왜 여왕 대관식이 있을까? 우리나라 고추 아가씨처럼 일정 기간 동안 마을을 위해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 미리 정해진 여왕이라니. 마을에 초등학교 7학년이 되는 여자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왕은 어떻게 뽑히는 걸까. 아무래도 '퀸'이니 '킹'이니 하는 단어를 대하는 태도가 그들과 같기는 힘들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나는 대통령도 잘못하면 국민 손으로 탄핵하는 나라에서 30년 이상을 살았다. 미국에 살 때는 미국 역사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뽑혔다. 그러다가 영국으로 왔더니 아직 여왕이 있단다. 그것도 의회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운 나라에 말이다. 물론 여왕의 존재가 내 삶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지만 첫째 딸이 "가이즈"라는 일종의 스카우트 클럽에서 활동할 때 여왕에 대한 맹세를 할 때는 좀 많이 어색했다.
우리 아이들이 참가했을 때가 마을의 80회째 <갈라 데이>였다. 꽤 전통이 있는 마을 행사다. 가족들이 한 마을에 사는 경우가 많고 이동이 적은 곳이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릴 때 참가했던 축제에 몇십 년 전엔 엄마나 아빠가, 이번엔 딸이나 아들이 참가한 집도 여럿이다. 여러 세대가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를 통해 마을 공동체는 더욱 끈끈해지니 참 좋은 행사다. 다만, 우리 말고 그들에게는 그렇다.
세월과 세대를 아우르는 마을 행사가 있다는 것이 부럽기는 하다. 나는 내 부모와 그럴만한 게 있을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떠오르질 않는다. 한국 살 때 서울에서만 살았던 나에게 우리 동네, 우리 마을이라는 소속감은 애초에 없었다. 자고 나면 상전벽해가 되고 이사도 자주 다니는 오늘의 서울 사람들에서는 아마 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왼쪽 사진 - 바우걸을 맡고 있는 첫째 딸 - 여왕이 지나가는 아치장식을 행사 내내 들고 있어야 한다
이듬해에 아이들에게 또 축제에 참가할 것인지 물었다. 첫째 딸은 중학생이 되어 더 이상 참가할 수가 없었는데 둘째는 단박에 안 하겠다고 했다. 여왕 대관식 때 땀을 흘리며 햇볕에 앉아 있어야 했던 것과 퍼레이드 경로가 길어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했던 경험이 그리 즐겁지는 않았던가 보았다. 여러 모로 우리 가족에게 큰 의미가 없다 보니 행사 당일에도 구경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리 딸들이 축제에 참가했던 건 순전히 의욕적인 엄마 때문이었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사오고 나서 처음 맞이한 7월에 참가해보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알아차리진 못했겠지만 내게는 그것이 이 마을의 주민이 되었다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주민 여러분! 스코티쉬가 90% 이상인 이 마을에 한국 가족이 사는데 그거 아세요? 우리 딸들도 퍼레이드에 참석했잖습니까. 같이 어울려 잘 살아보십시다! 하고 외치는.
-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 <갈라 데이> 현장 속으로 -
<갈라 데이> 퍼레이드에 참가 중인 하얀 요정들 - 어머! 우리 둘째 딸도 보이네!
퍼레이드를 구경 중인 동네 주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