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도착 1년 후, 집을 샀다. 봉천동 전셋집을 오를 때마다 수많은 아파트 불빛을 보며 꿈꿔 왔던 내 집을 향한 소망을 머나먼 남의 땅에서 이루게 되다니. 인생은 참 얼렁뚱땅 오묘하게 흘러간다. 네 식구 옹기종기 살기에 알맞은 아담한 테라스 하우스가 우리 집으로 당첨되었다.
영국에서 테라스 하우스(Terraced House)란 2층 집이 서너 채씩 한 건물에 붙어 있는 주거 형태를 뜻한다. 1950년에 지어진 집이니까 올해 69살이 되셨다. 아이고 어르신! 하지만 영국에서는 아직 청년 취급을 받는 얼마 안 된 집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집을 산 건 기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에든버러에 와서 1년 반 동안 플랏(한국의 빌라 같은 주거 형태)에서 월세를 내고 살았다. 120만 원 꼴의 월세를 집주인에게 주고 나면 매번 옆구리 한쪽이 살살 시렸다. 머릿속엔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1년이면 1,440만 원, 5년이면 7,200만 원인데 그걸 모아 내 손에 쥐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렌트를 해서 월세를 내나 집을 사서 원금 플러스 이자를 내나 어차피 비슷한 지출이 든다면 후자를 선택하자. 이 세상엔 <모기지>라는 아름다운 제도가 있으니 우리는 살포시 손을 얹어 사인을 하기만 하면 될 일. 이제 우리도 당당히 하우스 푸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세금 높은 유럽에서 자산을 모으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경제적 원리에 근거한 이론일 뿐이고 주거지를 옮겨야 하는 심리적 부담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우리가 살던 곳은 에든버러에서도 학군이 좋아 집값이 비싼 지역이었다. 이를테면 한국의 강남 같은 곳이었다. 집을 사려고 마음먹자 학군 안에서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은행의 힘을 빌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기대 엎어져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에든버러 외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려면 아이들이 전학을 가야 했다. 어린이집을 다녔던 둘째는 상관이 없었지만 친구들과 이미 돈독해져 버린 첫째 딸은 학교를 옮기기 싫어했다. 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외곽 마을에 관한 정보를 얻을 데가 전혀 없었다.
집을 살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마음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시골로 가면 인종차별이 도시보다 심하다던데 진짜면 어쩌지. 강남에서 경기도로 학군을 옮기는 게 맞나(비유하자면). 근처에 살면서 마음을 나누던 한국 언니, 동생은 이제 자주 못 만나는 건가. 이건 뭐 즐거운 나의 집 구매가 아니라 반지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원정대의 심정이었다.
행동대장 남편이 칼을 빼 들었다. 그는 여러 인터넷 정보를 수집해 에든버러 도심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시골마을을 하나 찾아냈다. 주민 2,000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인데 스코틀랜드 정부가 계획적으로 발전시키는 곳이라고 했다. 원래 살던 곳과 비슷한 수준으로 학군이 좋은 곳이었다. 현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첫째 딸을 설득시켰다.
그리하여 우리는 남편의 진두지휘 아래 에든버러 도심에서 외곽으로 슈웅~~ 하고 빠져나왔다. 모든 것이 느린 영국답게 집을 사는 과정도 두어 달 가까이 걸렸다. 이곳은 개인이 직접 사고팔 수가 없다. 주택전문 변호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처음엔 이 또한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지만 가끔 한국에서 부동산 매매 관련 사기사건을 접하면 '영국이라면 그런 일은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 동네 풍경 (왼쪽 사진: 동네 유일한 펍 / 오른쪽 사진: 우리집으로 가는 골목 언저리)
자고로 모험이란 희뿌연 안갯속에서 빛을 발하는 법. 반지든 파랑새든, 죽이든 밥이든 뭐든 찾아보겠다고 길을 나선 원정대에게 시골마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일상을 선사했다. <세계테마기행>을 보다가 <6시 내 고향>으로 채널을 돌린 느낌이랄까. 이제껏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문화 기행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 속으로 풍덩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 마을은 무슨 씨족 사회 같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거니와 한 집 건너 다 가족이다. 옆집 사는 마가렛만 해도 언니와 동생네 가족, 조카네 가족들이 30초 거리 안에 산다. 다른 가족들도 옆동네에 살아서 자주 들락거린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끼리 결혼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동네를 오가다 만나면 서로 인사하고 안부를 묻기 바쁘다. 마트나 약국에 가면 수다를 떠느라 계산대가 막힌다. 아무도 불평은 하지 않는다.
화요일 낮에는 동네에 생선 트럭이 오고 목요일 밤에는 피시 앤 칩스를 파는 차가 온다. 기름 냄새 폴폴 풍기는 피시 앤 칩스를 나도 몇 번 사 먹어 보았다. 처음엔 맛있었는데 몇 번 먹으니 질렸다. 금요일 밤에는 아이스크림 트럭이 와서 마을을 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에 초콜릿 막대기를 끼워서 판다. 날 좋은 주말이면 어김없이 잔디를 깎는 기계 소리가 난다. 아이들은 전교생이 120명인 학교로 옮겼다.
금요일 밤마다 마을에 오는 아이스크림 트럭 (하얀색)
다행히 동네 사람들은 텃세를 부리지도, 우리 가족을 차별적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대부분 친절했다. 악센트가 매우 강한 스코티쉬 악센트를 써가며 상냥하게 대해줬다. 우체국이 어딘지 몰랐을 때 피터는 직접 우체국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무 손질하는 마이클에게 "정원 관리하시나 봐요" 하고 물었더니 자기네 뒷마당까지 나를 데려가 앞으로 어떻게 꾸밀 건지 설명해 준 적도 있다. 저녁 준비를 하는데 계란이 없어 앞집 엘렌네 뛰어갔을 때는 냅다 집 안으로 잡아끌었다. 계란이 2개 필요했는데 6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어느덧 시골마을로 이사 온 지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사 후 우리 가족은 영국 도착 처음의 순간처럼 새로운 환경, 사람들에 적응하느라 다시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남편은 걸어서 20분이면 족하던 출퇴근 시간이 2-3시간으로 늘어났다. 도시에 살았다면 편하게 이용했을 가게들도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는 큰 마음을 먹고 나가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시골마을로 이사 온 것이 좋지만은 않았다. 왠지 도심에서 밀려난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건물의 외관이 낡아 우중충해 보이는 마을도 별로였다. 흔히 말하는 워킹 클래스(노동자 계급)를 포함, 다양한 계층의 동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다 노파심이었다.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멀리서 날아온 이방인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인데 내가 막혀 있었던 거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삶의 지혜가 생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만의 색안경을 쓸 일이 많아진다. 그러기에 제대로 된 어른이 되는 것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보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낡은 시골집 안에 숨어 있는 다채로운 삶의 방식, 작은 행복 같은 걸 찾을 수 있다. 투박하지만 다정한 붙박이 이웃들, 넓은 정원, 산과 들, 맑은 공기, 새소리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스코틀랜드의 특별한 문화를 소개하는 <세계테마기행>보다는 동네 커뮤니티센터에서 금요일마다 요가 수업을 진행하는 스코티쉬 60대 할머니의 이야기를 소개할 것 같은 <6시 내고향>이 훨씬 푸근하고 정감 있다는 사실을.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은 그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