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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이 Jul 15. 2022

임신일기 #8_17주차 넘실대는 호르몬 파도 위에서

#1 분노의 파도


벌써 임신 17주차에 접어들었다. 

자꾸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호르몬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 같았으면 그냥 넘어갈 일들도 짜증나고 슬프고 심지어 눈물까지 난다.


저녁식사 준비를 마치고 밥먹자고 부른지 몇 분이 지나도록 남편이 오지 않아 짜증이 났다. 남편은 남편대로 갑자기 생긴 급한 일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을텐데 그래도 솔솔 열이 올랐다. 예상치 못한 일이란 변수의 등장으로 음식은 뜨거울 때 꼭 먹어야 한다는 나의 신념이 지켜질 수 없음에 화가 났다(!). 뒤늦게 나온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고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다 보니 일하랴 밥하랴 대충 먹지 않고 달이를 생각해서라도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챙겨먹겠다고 레시피를 찾아보며 아등바등 요리하는 내 자신이 갑자기 서러워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요리도 같이 하고 설거지와 빨래, 청소, 후식 과일 준비를 열심히 하는 남편이지만 그래도 더 많이 나를 챙겨주면 좋겠다는 투정어린 마음도 고개를 들었다. 


요새 나는 사춘기 소녀같다. 이성적으로는 내맘대로 내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내 행동은 삐침과 짜증으로 가득차있다. 임신중 호르몬의 영향도 분명 있겠지만 (그렇다고 믿어본다) 고관절과 허리, 왼쪽 어깨와 가슴 통증 등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체력의 한계 때문인것 같기도 하다. 몸이 힘드니 내 짜증의 임계치도 뚝 떨어져서 사소한 것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심술이 나는 모양이다.


앞으로 임신 후기를 향해 가면 갈수록 몸에는 더 큰 무리가 될거고, 나는 겪어보지 못했던 종류의 아픔과 통증을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 지금부터 이러면 나중에 어쩌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든다.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내 뜻과 욕망을 잠시 내려 놓고 좋아하는 음악과 폭신한 이불로 피신해서 사춘기 호르몬의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려 본다. 



#2 나를 중심에 두는 연습 


나는 재택근무를 하고있다. 임산부인 내게 재택근무는 장점이 훨씬 더 많지만 아무래도 동료들과 물리적으로 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소통과 공유의 장벽이 생기는 게 일하면서 가장 불편하다. 특히나 거래처라는 제3자가 있으면 더욱 어려워진다. 거래처 담당자가 나하고만 전화 통화로 이야기하는 경우엔 팀 전체가 알아야 할 내용인데도 나만 알게 되어버려서 그럴땐 이메일로 내용을 달라고하여 팀과 공유하거나, 아니면 내가 간단한 통화 내용을 요약해서 팀방에 공유하곤 한다.  

 

어느날엔 그동안 수차례 30분은 기본이고 1시간 가까이 통화하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는 거래처분께 전화(테러)가 왔다. 통화가 20분쯤 넘어가자 도저히 팔도 아프고 머리도 아파서 못 듣겠는 지경에 이르렀다. 재택근무를 하고 있으니 팀 전체와 공유할 수 있도록 전화가 아닌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내용을 정리해서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드렸음에도 주구장창 전화를 하거나 내가 부재중이면 전화를 달라고만 하는 그분께 그날은 힘주어 말씀드렸다. 이렇게 전화로 말씀하시면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팀 전체와 공유도 해야하니 반드시 이메일로 달라고. 제발. 


얼마전 남편은 내게 앞으로 더더욱 나를 중심에 두고, 나를 먼저 생각하면 좋겠다고 했다. 평소 내가 다른 사람의 생각과 시선을 너무 의식하는 것 같다면서. 그 말에 힘 입은 걸까, 아니면 임신으로 인해 몸이 힘들어져 임계치가 낮아져서일까 당당하되 정중하게 용기내어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가 아니라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서 상대방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것도 꽤 괜찮구나, 연습이 필요한 거구나 싶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내 머릿속과 온 몸 구석구석에 임신이라는 친구가 지배하고 있는 기분이다. 엄청난 존재감이지만 '임산부'만이 나의 유일한 정체성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단 생각도 든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지 더 세세하게 관찰하고 나를 더 많이 알아가야 겠다. 나를 중심에 두고, 나를 먼저 생각하면서. 



더 많은 그림은 인스타그램 @tongitori 에서 볼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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