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용기가 가난한 탓에

시작이 성급하지 않았더라면.

by 파인트리

사람은 목소리부터 잊힌대요.

내가 당신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과연 그때가 온다면

내가 서서히 당신을

그저 수많은 기억 중 하나로

흘려보내는 것이

기어이 시작된 것이겠죠.

그때가 올까

벌써 두렵습니다.

세사에서 가장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

세상에서 가장 차갑게

끝을 불렀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그리도 선명한 마음을 내어주고선

마치 우리가 허상이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나요.

아마 지금의 당신은

내가 알던 당신의 모습이 아니겠죠.

하지만 여전히 나의 일상엔

당신의 목소리와

당신의 미소와

당신의 모든 것들이

뚜렷하게 남아있기에

나는 아직 그때의 당신을

잊지 못하였습니다.

과연 흐릿해지긴 할까요.

밤이 그윽이 깊어가고 달이 채워지면

목에 걸린 토성을 꼭 쥐고

절실한 기도를 합니다.

나의 간절함이 당신에게 흘러가고

당신은 그 간절함으로

나를 떠올리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당신을 만나고 생긴

나의 작은 습관임을.


나는 당신을 보내기엔

너무나 가난한 용기를 지녔습니다.

우연한 마주침을 기대하며

당신과의 시간이 머무른 자리를

이따금씩 들러볼게요.

그저 엉클어진 기억 속에 남지 않게.

당신의 목소리를 잊지 않게.

야단스러운 마음이

은근하게 내려앉으면

어슴푸레했던 앞이

서서히 선명해지고

당신을 짙게 볼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서로를 대할 수 있길.


너무 성급하게 사랑을 시작한 건지

너무 쉽게 끝을 내려고 하는 건지

어떤 이유에서 당신은

그렇게 급하기만 했던가요.

서둘러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면

그게 당신이 나를 놓아야만 했던 이유라면

무모한 결정은 아니었길.

당신과의 시작과 끝은 바빴지만

아늑하고 고요하게 버티렵니다.

내가 위태로워질 때

나를 잡아줄 끈이 당신이길

굳게 바라고 있기에


- 파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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