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한 글자 주제, 욕
언제부터였을까, 욕을 이렇게 많이 쓰게 된 건.
솔직히 말하면 욕을 잘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친구 중에, 지인 중에 욕을 찰지게 하는 사람들을 보고 저것도 참 재능이다 싶었다. 그들이 하던 욕은 욕 같지가 않았다. 얼씨구절씨구 같은 추임새 같았다. 간혹 화가 날 때 하는 욕은 속을 뻥 뚫어주는 가스활명수 같았고, 기분 좋을 때 깔깔대며 하는 욕은 문장과 문장의 이음새 같았다. 그들의 욕을 들으며 같이 웃고, 같이 화를 냈다.
나는 욕이 늦게 트인(?) 편이다. 한창 친구들이 욕을 배워 서로에게 내던질 때에도, 차마 욕을 뱉어내지 못했다. 다들 하니까, 나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대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을 쓰자니 언제 써야 할지 타이밍 잡기가 어려웠다. 별 뜻 없이 하는 말이라지만, 그래도 적당한 때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찰질 리가 없었다. 한동안 방에서 몰래 연습도 해봤지만 욕이란 건 연습이라는 게 참 어려운 말이었다. 종류도 어찌나 많은지.
“사실 욕이란 게 연습한다고 늘겠냐, 술 마신다고 늘겠냐. 그냥 사는 게 씨발스러우면 돼. 그러면 저절로 잘돼.”
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에 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작가분도 주변에 욕을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욕을 잘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찰지게 욕을 하는 친구들을 모아놓고 욕 과외를 부탁한다. 씨와 발 사이의 간격과 악센트를 조정해가며 자세히 배웠지만 영 어색했다. 그때 친구가 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사는 게 ㅇ 같으면 저절로 욕 나온다고.
그래서일까, 나는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부쩍 욕이 늘었다. 분노할 일이 많은데 회사에서 쏟아내긴 어려우니 참고 참다 친구들 앞에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압축적이게 화를 해소해야 하니 강도 높은 말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욕이 입에 착착 붙기 시작했다. ㅇㅇ, ㅇ같다, ㅇㅇㅇㅇ ㅇㅇ 짜증 난다 등등등. 하지만 욕이 주던 통쾌함도 잠깐, 욕이라는 말버릇이 모든 감정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나는 상태가 아닌데도 정말 습관처럼 욕이 나왔다. 욕을 툭 뱉어놓고는 아차 하는 순간도 많아졌다. 땅바닥에 뱉어놓은 침처럼, 주워 담을 수도 없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게 내 입에서 나왔는데도 말이다.
요즘은 욕을 줄이려고 하고 있다. 많은 욕이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탓에, 욕을 하는 내가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죄책감도 느껴져 더 노력하려고 한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나더라도, 최대한 점잖은 단어를 선택하고 싶다. 감정 중립적이면서도 명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잘 들린다는 것도 최근 느낀다. 겉으로 나의 분노를 표현하는 목적은 분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분노를 해소하거나, 혹은 분노할만한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욕은 분노를 해소해주지도, 나를 분노하게 한 원인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화를 내는 습관마저 만들어버린다.
가장 좋은 건 분노할만한 일이 없는 거긴 할 거다. 하지만 특정한 분노들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때로는 내 감정을 내가 다스리지 못해서, 때로는 계획에 없던 불쾌한 경험을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둘 중 무엇이더라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고 싶다. 내 감정을 내가 정의할 수 있도록 마음과 말을 다듬고 싶다. 그러기 위한 마땅한 언어가, 그리고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연습해야겠다. 말을 내뱉고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고 나서 말을 하는 연습. 제일 어렵겠지만, 제일 중요한 습관 중에 하나니까. 그렇게 해봐야겠다.
번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꽤 좋아하는 욕이 있다. 외할머니의 호탕한 옘-병 소리다. 하지만 요새는 이것도 자주 들을 기회가 없다. 세월 때문에 기력이 약해지신 탓인지, 외할머니의 시원한 목청 듣기가 그렇게도 어렵다.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시면 좋겠다. 다음에 뵈면 시답잖은 농담이나 많이 해야겠다. 호쾌한 옘-병 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