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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Sep 08. 2019

아빠들은 생율만 깎아놓고 생색을 냈다

열 번째 한 글자 주제, 밤: 여느 집의 추석 풍경



비가 세차게 내리더니 금방 바람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다시 추석. 이번에는 유난히 빠르긴 하지만 하여간 날씨로만 보자면 완연히 추석이다. 차례를 지내지 않는 추석이 벌써 네 번째지만 여전히 차례 준비가 빠진 추석은 영 명절 같은 느낌이 나지 않는다. 그냥 평소보다 조금 긴 주말 같달까. 종교나 집안에 따라 애초에 제사를 안 지내는 집도 많겠다만, 아주 어릴 때부터 집에서 제사와 차례를 지내 온 내게는 명절이란 꼭 차례와 동의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건대, 내가 그걸 그리워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내게 추석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란 딱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아마 초등학교 1-2학년쯤 되었을까, 하여간 제사가 뭔지도 정확히 모를 때였다. 그게 온전히 남자들의 영역이라는 것은 더더욱. 내내 엄마 옆에서 이것저것 음식을 집어먹다가 이제 차례를 지낸다기에 나도 얼른 차례상 앞으로 달려갔다. 곱게 한복까지 차려입은 터였고 어떤 엄숙하고 어른스러운 일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때에 안 맞게 나름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절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고 친할아버지는 대뜸 인상을 찌푸리셨다. 계집애는 절 올리는 것 아니니 썩 가서 엄마나 도우라고 하셨던가. 정확한 워딩까지 기억나진 않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경험한, 어떤 견고한 선 밖으로 내쳐지는 아주 서글픈 느낌이었다. 내 어린 남동생이 그 선 안쪽에 말간 얼굴로 서서는 쫓겨나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더더욱. 나는 그 날 많이 울었고 어른들은 나를 달래주었지만 결코 절을 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 일이 있고 한 10년쯤 뒤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첫 제사에서, 아빠가 나더러 이제 술을 올리고 절을 해도 된다고 했다. 깐깐하게 법도를 따지던 할아버지가 자리에 안 계시니 이제 그래도 된다는 말이었다. 참 나. 10년 만에 허락받은 어떤 권한이 우스워 나는 코웃음을 쳤고 싫다고 단단히 버텼다. 이제와 기다렸단 듯 달려갈 수 없는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만... 아니 아빠 생각을 해보세요. 그 강경하시던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받으시는 제사상인데, 계집애가 절하는 걸 반기시겠냐고요? 



둘째. 

꼭 그 날의 경험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명절이 오면 늘 붙박이처럼 부엌에 있었다. 너무 어려서 이것저것 건네주는 것 말고는 크게 도움이 안 될 때부터 그랬고, 고등학생쯤 되었을 때는 얼추 일손을 도울 만큼은 되었다. 딱 그쯤 되었을 때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만큼 괜히 마음이 달아서 나는 하루 종일 엄마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날이 선선해진 지 오래였지만 계속 불 앞을 지키고 앉아 몸을 쓰려니 땀도 송골송골 나고 했다. 그러다가 엄마가 문구점에 가 전지를 사 오라고 해서 밀가루를 툭툭 털어내고 일어서는데... 우리 집의 다섯 남자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사촌동생, 친동생, 작은 아빠, 사촌동생2, 그리고 우리 아빠까지. 일렬로 나란히 붙어 앉아서는 뭔지 모를 TV 프로그램을 다 같이 시청하며 실실 웃고 있었다. 나는 땀을 닦아가며 탕국을 끓이고 있는 엄마와 바닥에 주저앉아 허리를 두드리며 몇 시간째 전을 부치고 있는 작은 엄마를 잠깐 돌아보고, 다시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는 남자들을 보았다. 그 장면이 가히 충격적이어서 그 날 일기에도 꾹꾹 눌러썼으나 딱히 기록할 필요도 없었다. 그 뒤로 나는 그 장면을 결코 뇌리에서 떨칠 수 없었으니까. 마치 전혀 다른 시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아빠와 작은 아빠가 일을 돕지 않는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게 그 아들들에게 그렇게 쉽게 전염되는 것인 줄은 몰랐다. 내가 엄마의 일을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듯이 아마 아들들도 아빠의 휴식을 당연히 같이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정말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벙쪄서 멍하니 서있던 나 자신까지도 포함하여. 뭐, 기실 비슷한 장면이 이후 매 명절마다 반복되었으므로 잊을래도 잊을 수가 없었지.



셋째. 

추석 전 날. 차례상을 준비하는 건 거의 전쟁에 가까운 일이었고, 그 전쟁통 같은 하루에 엄마와 작은 엄마가 해야 할 일을 쪼개 보면 아마 수백 가지는 거뜬히 넘겼을 거다. 그리고 그중 아빠와 작은 아빠가 도와주는 일은 딱 하나, 생율의 껍질을 까는 거였다. 그리고 아빠는 밤을 깎는 내내 생색을 냈다. 기껏 해봐야 딱 상에 올릴 만큼만 까면 되는 거라 생율의 개수는 스무 개를 넘지 않았는데도. 칼이 잘 안 든다, 이번 밤은 물러서 잘 안 까진다, 손가락이 아프다... 툴툴대며 한 열 개쯤 깐 이후에는 형의 권력을 이용하여 작은 아빠에게 보울을 툭 넘겼다. 힘들다, 네가 좀 까라. 그러면 작은 아빠는 그걸 넘겨받아 다시 껍질을 까기 시작한다. 동시에 생색도 같이 넘겨받는다. 아니 이거 대체 왜 이렇게 안 까지냐며. 


물론 나도 안다. 생율은 단단하고 껍질은 결코 홀라당 벗겨지질 않는다. 물에 담가 살짝 불린 것을 꽉 쥐고서 칼로 살살살 깎아내는 일은 보기보다 꽤 힘이 많이 든다. 잘 벗겨지지 않고 칼이 엇나가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간 손을 벨 수도 있다. 남들이 다 놀고 있을 때 나 혼자 생율을 열 개쯤 까야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면 나 같아도 툴툴대며 밤을 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백 가지 일을 해내느라 전투 중인 와중에 나는 딱 생율 열 개만 까면 되는 거라면? 부엌이 열기로 후끈후끈한 와중에, 엄마와 작은 엄마가 땀 닦을 시간도 없이 앉았다 섰다 하며 기름 냄새에 메슥거려하는 와중에, 딱 생율 열 개씩을 까놓고 오만 생색을 내는 아빠와 작은 아빠가... 나는 미웠다. 


동시에 거기다 대고 겨우 그깟 걸로 생색을 내냐고 한 마디 하지 않는 엄마와 작은 엄마도 미웠다. 정확히 말하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내가 모르는 모종의 계약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체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내 어린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부엌에서 준비할 것이 차고 넘치는데, 엄마는 절대 생율 말고 다른 일을 아빠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아빠 역시 마찬가지라 지나가는 말로라도 '뭐 또 도와줄 거 없어?'하고 물어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둘 사이에 (그리고 작은엄마와 작은아빠 사이에도) 뭔가 비밀스러운 계약이 체결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제3자의 눈으로 볼 때 그건 완전히 불평등 계약이었다. 아니 도대체 왜? 심지어 우리가 준비하는 제사상은 아빠들의 부모님을 위한 제사상이 아니었냔 말이다. 작은엄마, 작은엄마는 심지어 시어머니를 뵌 적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게 추석은 결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느낌의 축제가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엄마는 며칠 전부터 장을 보랴 전을 부치랴 국을 끓이랴 나랑 5초 이상 눈을 마주쳐주지도 못할 만큼 바빴고 내내 비지땀을 흘렸다. 아빠는 추석특집 영화나 예능 특집 같은 걸 내내 보다가 그대로 TV 앞에 앉아 엄마가 건네 준 생율을 열 개 깎았다. 제사상 준비는 모두 엄마의 몫, 그리고 그 준비된 것들을 가지고 제를 올리는 건 아빠의 몫. 그리고 나는 내가 어느 쪽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내게 소리를 지르셨을 때부터. 그 뒤로 모든 어른들이 덕담과 칭찬을 번갈아 건네며 내 역할을 더 명확히 해주었다 (어린애가 손이 야무지다, 송편을 잘 빚어야 나중에 예쁜 딸을 낳는다, 엄마도 잘 도와주고 착하다 등등). 아주 자연스럽게도 역할 분담은 점점 공고해졌다. 나는 부엌에서 엄마 일을 도울 때 칭찬을 받았고 남동생은 제사상에 술 올리는 법을 배우며 칭찬을 받았으니까. 


엄청난 의구심을 품었던 것과 별개로 나는 그 불평등한 시스템에 아주 잘 적응했다. 나는 늘 모범생이었고 결코 불의를 위해 싸우는 타입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자존심이 세서 남자들만의 리그에 나도 껴달라고 동동거리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겠다고 떼를 쓰지 않았다. 지방 쓰는 법을 나도 가르쳐 달라고, 적어도 남동생보다 내가 한자를 더 예쁘게 쓰지 않냐고 우기지도 않았다. 아빠가 동생한테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제사상 차리는 법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때면 나는 옆에서 얼쩡거리지 않고 바로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건 내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부엌에서 엄마와 같이 음식을 만들어서 제기 위에 예쁘게 올려다가 거실의 아빠에게 가져다주면 그게 내 역할의 끝이었다. 제사상 위에서 그걸 법도에 맞게 배열하는 건 남자들의 일, 멋들어지게 지방을 써서 (본인들의) 조상님을 초대하는 것도 남자들의 일,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 것도 남자들의 일. 


글쎄, 이제와 제사일 분담의 불평등함에 대해 소리 높여 비난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집은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이제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결코 그런 명절을 바라거나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 요즘에는 세상이 좋아져서 생율도 깔 필요가 없다. 깨끗하게 까서 세척까지 해서 포장된 것을 마트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세상이 좋아졌는데도 아직도 제사상 준비를 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주변 언니들의 이야기를 매 명절마다 듣는다. 여전히 명절이 지나면 명절증후군으로 고생하는 다른 집 엄마들의 이야기도. 



그럼에도, 그저 그들이 현재 보내고 있는 추석이 내 기억 속의 추석보다는 좀 더 친절하고 평등한 명절이기를. 언제고 이게 다시 내 이야기가 되어 다른 집안의 제사상을 차릴 때가 오면 그때는 또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를. 적어도 생율 하나와 차례상 전체를 두고 불평등 계약을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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