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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Sep 08. 2019

가을밤에는 테라스에

열 번째 한 글자 주제, 밤.

이렇게 밤공기가 선선해지는 여름의 끝자락, 그리고 가을의 첫 자락이었던 것 같다.

4년 전 9월, 두 달간의 남미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일부러 추가 학기를 듣지 않는다면 마지막 학기였다. 한국 땅을 밟자마자 본격적으로 취준생인 셈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아직 남미의 햇볕과 와인, 고기가 나를 꽤나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두었는지 아직 불안감은 몰려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자취방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본격적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쏘다녔다. 모임마다 하는 이야기는 비슷했다. 야 너도 이번에 마지막 학기지, 취준이나 같이하자. 자소서나 같이 쓰자. 스터디나 하자. 본격적으로 고민도 안 하면서 고생길이 훤한 것처럼 서로 투정을 부려댔다. 우리끼리의 연대감을 자랑하는 일종의 말장난이었다.

9월 둘째 주쯤이었을까, 본격적으로 채용 공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친구들마다 개인적인 취향과 욕심은 있었지만,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쓰는 데는 다들 비슷했다. 회사들은 저마다 어디는 삼백 자씩 네 문항을 요구했고 어디는 천자씩 두 문항을 요구했다. 마치 이 회사에 오기 위한 경험을 열정적으로 쌓은 사람처럼 이야기를 써내며 함께 머리를 싸맸다.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됐다. 마감을 끝낸 밤에는 술을 마셨다. 문제를 뭐 그딴 식으로 내냐는 불평과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집이 좀 먼 친구들은 차 끊기는 시간에 맞춰 돌아갔다. 걸어갈만한 거리에 있던 동네의 우리 둘은 남아서 수다를 더 떨다 눈을 뜰 수 없을 때쯤에야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9월 말이었을까 10월 초였을까, 습한 기운 하나 없이 쾌청한 밤 날씨가 계속되던 때였다. 어느  원서를 마감하고서는 테라스에 가자며 안 갈 수가 없는 날씨라며 나와 내 동네 친구(?)는 한껏 신나있었다. 며칠 전부터 날을 잡았다. 벼르고 벼르던 날엔 비가 왔다. 그래도 이왕 일단은 만나기로 했다. 여기저기 떠돌다가 토토의 와인가게에 들어갔다.

얼큰하게 취했던 날이지만 날씨 때문에 테라스에 실패했으니 재도전을 하기로 했다. 친구는 어디서 알아왔는지 악어라는 이름의 옥탑이 있는 술집을 알아왔다. 술도 비싸지 않아 좋았고, 안주도 뭐 하나 빠짐없이 맛있었다. 사실 주렁주렁 매달린 전구와 선선한 바람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맛있다고 생각한 걸 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이서 와인 두병을 해치우고선 2차 타령을 해댔다. (그때 기억은 사실 가물가물 하지만) 대만 야시장으로 이동해서는 그의 친구도 함께 했다. 삼차까지도 먹었던 것 같다. 자세한 기억은 안 나지만, 꽤나 웃겼던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날들이 몇 주 내리 이어졌다. 면접의 한 단계를 통과하면 통과하는 대로,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테라스를 찾았다. 이제는 선선하다고 우기기엔 쌀쌀하던 늦은 11월 끝자락에서도 아지트가 되어버린 악어 옥탑에서, 담요를 둘둘 감고 감바스니 에그인헬이니 뜨끈한 안주를 먹어댔다. 그리고 가을이 끝나갈 무렵, 그는 지금의 애인이 되었다.

속상하게도 그때 그 아지트는 올해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밤공기가 서늘해질 때면, 그때가 계속 생각난다.

그때 그 밤공기의 미적지근하다가도 선선한 온도, 괜히 하나만 더 먹어보자며 부리던 식탐, 옥탑 아래 지나가는 사람들의 정수리  등등. 사실 없어지지 않았을 때도 이제는 생활권에서 너무 멀어져 찾지 못했던 그곳이지만, 그래도 언제고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립고 아쉽기만 한 곳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미뤄왔던 숙제를 할 시간이다. 그곳의 대체재를 찾아봐야 할 때다.

지금은 9월의 첫 자락, 밤공기가 선선해지고 마음도 괜히 설렘으로 부푸는, 테라스 가기 좋은 때이니까. 가을밤에는 역시 테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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