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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Oct 06. 2019

철이 든 어린아이로 자란다는 것은

열두 번째 한 글자 주제, 철.

“어렸을 때 징징대 본 적 있어요?”
“당연히 있지만, 양껏 해보지는 못한 것 같아요.”
“양껏. 그 말 좋네. 양껏이 중요해요.”


최근에 받은 심리상담에서 나온 이야기다.


부모님은 다르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의 나는 어른스러운 편이었다. 혹은 어른스럽다는 소리를 듣는 걸 좋아했거나.

그래서 엄마를 대신해서 설거지를 하고, 무엇이 갖고 싶어도 너무 조르지 않고, 일단은 열심히 참는 연습을 했다. 말 잘 듣고 일찍 철든 착한 큰 딸, 그게 나의 역할이었다. 가끔 학원을 빼먹고 싶을 때도, 혼이 나고 싶지 않았다. 혼 한번 나지 뭐, 이런 건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칭찬을 받는 게 좋았고, 문제를 일으킬 때는 불안했다. 한동안 가족 내 분란이 있을 때도, 분란이라는 것에 내 분량은 없었다. 나는 철저히 해결자 입장이나 중립자 입장에 머물렀다. 그러면서도 사실, 아주 솔직히 얘기하자면 살면서 한 번도 분란을 일으켜서까지 하고 싶은 게 내게는 없다는 생각에 침울해지기도 했다. 분란 제공자에게 주어지는 “철이 없어서 그렇다”는 비난에도 나는 왜 철이 들어서 뭐 하나 마음대로 하는 느낌이 없는 건지 답답했다. 그럼에도 일단은 내가 문제 제공자가 아닌 것이 안심이라면 안심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내가 어른스러운 사람이냐고, 철이 들었냐고 하면, 자신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철든 어른의 모습은 1) 필요에 따라 감정을 잘 조절하고, 2)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에 충분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 3) 그리고 스스로 내린 결정에 충분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꽤나 감정적인 데다가, 가끔은 상황과 맥락에 맞지 않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 예기치 못한 눈물이 갑자기 터지는 바람에 당황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크고 작은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 결정을 미루는 때도 파다하다. 항상 의지할 사람과 무리가 필요하고,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는 꽤나 불안정해진다. 왜 나는 나 하나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지 조바심이 더해간다. 정말, 나의 ‘어른’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은 건지, 도저히 닿을 길이 없다.


이런 와중에 저 이야기는 꽤나 큰 위로가 됐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양껏, 부족하지 않게, 내가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이 - 그게 징징대는 거라고 해도 - 예쁨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필요했구나. 그런 사람이 지금 내 주변에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에게 질려 떠나가면 어쩌나 불안했구나. 기댈 수 있는 좀 더 안정적인 그룹도 필요했구나.


철이 든 어린아이는 철이 든 어린아이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고 어쩔 수 없이 어른이라고 불리게 되더라도, 철이 든 어른이 저절로 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철이 든 어린애, 그리고 철이 안 든 어른 그 사이에 머물러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이런 처방을 내려주셨다.


지금에라도, 양껏 징징대고 양껏 예쁨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확보해보세요. 지금 일대일로는 그래도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 같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그걸 3명이나 4명 그룹으로도 만들어보세요. “예쁨 받음” 지수 충전이 필요할 때, 혹시 그분들이 놀랄 수 있으니 미리 예고하고 양껏 징징대 보세요. 그리고 양껏 우쭈쭈도 받으세요. 서로 그런 걸 해줄 수 있는 모임이 있는 게 중요해요. 그렇게 채워놓고 나면 한동안 스스로를 잘 지탱해 낼 수 있는 힘이 생길 거예요.


물론 이런 모임을 만들더라도 불안정한 사람이 뚝딱 안정적인 사람이 될리는 없다. 내가 갑자기 철든 어른이 되지도 못할 테다. 그래도 적어도 억지로 만들어낸 철든 어린아이에서는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안정감을 되찾고, 지금의 ‘나’로 괜찮다는 균형감을 찾고 싶다. 그러고 나서는 좀 더 자신감을 갖고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질 수 있지 않을까. 감정도 자연스럽게 제어가 되기를 기대한다.


아이다운 아이, 어른다운 어른이라고 정해진 건 사실 내 안에도 명확한 기준이 없다. 아이다운 아이로 자라나지 못한 상황의 과거를 미워하고 있지도 않다. 그래도 내가 되고 싶은 어른이 되게 위해서, 이제 억지로 철든 척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달래줘야 한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철이 들어도, 혹은 누군가의 눈에는 "충분히" 철들지는 않았어도, 이만한 어른이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자라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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