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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격을 묻는가

하재영 작가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읽고

by 소녜

1.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개는 내 눈에 띈 개


호두를 산책시키는 산책로에는 아주 마음이 쓰이는 개가 한 마리 있다. 낡은 닭장 옆에, 꼭 닭 장만한 크기의 집에 가득 차는 사이즈의 개. 털이 길고 꼬불꼬불한 얼룩이. 그 집 앞을 높은 잡초 덤불이 가로막고 있어 한동안은 개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어느 아침이었는지 저녁이었는지, 호두와 함께 코너를 도는데 어디선가 큰 개의 짖는 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풀숲 사이로 흔들리는 꼬리가 보였다. 개가 있었다. 목욕은 언제 했을지 잔뜩 꼬질꼬질해진 모습이었다. 호두를 보고는 전혀 공격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톤으로 웡-웡- 하며 천천히, 하지만 연거푸 짖었다.


그 이후 그 길을 지나갈 때면 나는 그 구석을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가끔은 미동도 없어 걱정이 된다. 혹시 어디 아픈가, 병에 걸리지는 않았나, 이렇게 막 키우는 걸 보면 누구한테 팔았을지도 몰라, 온갖 생각을 한다. 그러다 어느 날은 그 개가 호두를 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줄이 일 미터는 되는지, 아니면 공간이 좁아서인지. 몸을 돌리려면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작은 그 견사 안으로 한번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그렇게 바지런을 떨면서까지 호두를 지켜보다 다시 웡- 하고 짖는다. 마치 여기 좀 봐달라는 듯이.


위생도 식사도 걱정이 되어 가까이 들여다볼까 싶다가도, 내가 품을 수 없는 아이인데, 그리고 법적으로는 다른 이의 소유물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멀찍이서 눈길만 줄 뿐이다. 어디 단체에 사진이라도 보내 구조요청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도 해봤다. 하지만 그게 이 개를 위해 더 좋은 일일지, 혹은 가능한 일인지 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사실은 그저 내 눈앞의 개가 불쌍해 보여, 좋은 사람인척 해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물보호단체에 들어오자마자 이 개 좀 구조해달라고 했다는, 그러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 호두가 나에게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나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동물권이나 동물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호두가 막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한참 자취 중이었다. 자취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바로 친해지지는 못했다. 아침 일곱 시에 출근해서 밤 아홉 시에 퇴근하는 회사의 신입사원이었고, 그나마 일이 일찍 끝난 날에는 회식이며 약속이며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 바빴다.


그러다 호두와 가까워진 건 웃기게도 나의 우울 탓이었다. 한번 흠이난 마음은 자꾸자꾸 흠을 후벼 팠다. 회사생활은 고달팠고, 아무것도 재미있지 않았다. 새로운 거라도 해보자 고민하다 생각해낸 건 나 혼자 호두 산책에 성공하는 거였다. 워낙 힘이 센 탓에 아빠 없이는 산책을 못 시킨다고 생각했었고, 시도조차 겁나던 때였다. 그래도 모든 일엔 처음이 있는 거니까, 하고 나간 첫 산책은 힘들지만 뿌듯했다. 그 이후로 줄곧 산책 당번은 내가 됐다. 가끔은 호두에 잡아끌려 넘어지기도 하고, 손에는 물집이 없어지자마자 새로 생겼지만 마음의 생채기는 옅어지는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생겼다고 한 마디씩 하면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고단했던 날, 어떻게 알았는지 옆에 가만히 와 앉던, 손등을 핥아주던 호두는 사랑스럽고 고마웠다. 이렇게 천사 같은 존재가 또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존재들을 더 보고자 트위터에서 동물 계정을 잔뜩 팔로우하기 시작했다. 주로 중형견 내지 대형견 계정들이었다. 나와 비슷한 고충을 지켜보며 위안을 얻고, 한편으로는 또 귀여운 모습에 힐링이 됐다. 때로는 대형견 혐오, 혹은 동물 혐오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이 눈에 보였다. 알고 보니 대부분의 아이들은 유기견 출신이었다. 그들을 입양한 사람들은 자주, 끊임없이 #사지 마세요 입양하세요 라고 외치곤 했다. 그전까지는 유기견은 그냥 길을 잃은, 혹은 일부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명절에 버리고 가서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번식장이니 개농장이니 그 존재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구조에 대해 전혀 몰랐다. 모견과 종견이 어떻게 착취당하는지. 펫 샵으로 팔려가는 아기 강아지들은 어떤 고통을 겪는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이렇게 호두라는 강아지가, 내 세상을 완전히 바꿔놨다.


3. 이 이야기는 자격 없는 이의 응답이다


그렇다고 내가 실천 주의자가 된 건 아니다. 호두에게도 100점짜리 주인조차 아니다. 아직도 호두를 챙겨주는 모양새는 내 몸과 마음이 편한 범위 안에 들어있다. 고기를 좋아하고, 동물 실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동물의 가죽이나 털로 만든 옷도 적지 않고 입고 다닌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항상 딜레마가 있었다. 고기를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개고기에 대한 반감을 표한다는 건 파렴치한 거 아닐까. 내게 개라는 동물이 특별한 존재라고 해서, 다른 동물들이 특별하지 않은 존재인 건 아닌데, 개 이야기만 해도 되는 걸까. 내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 너도 다 못 지키는 걸 왜 나한테 강요하냐고 할까 겁이 났다.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덕성으로 비난한다는 건 위선이고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


“다른 윤리적 영역에는 결코 적용하지 않을 사고방식이다. "

완전 무결한 사람만이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뭐라도 말하고 뭐라도 하는 사람에게 왜 다른 “더 중요한 것”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은 정작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누가 어젠다를 결정하는가. 무엇이 중하고 경한지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이 중요한지는 누가 정하는가. 그리고 그 어젠다를 짜는 사람은 정작 이 주제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보았는가. 중립인척 말을 얹는 사람은 결국 방관주의자일뿐이다.


한편으로는 젠더이슈 플로우도 겹쳐 보였다. 해일이 오고 있는데 조개를 줍냐던 그들, 이만하면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건데 뭐 그렇게 불만이 많냐던 그들 등등. 기득권이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을 때 항상 나오는 플로우는 비기득권이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깎아내리고, 비가시화하는 것이었다.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즘은 신이 아닌 인간의 것이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꼭 거대한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내 안의 기준을 만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부당함에 맞서면 되는 거라고.


동물권, 혹은 동물복지도 마찬가지다. 내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비건이 될 수 있지는 않을 거다. 지금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활동가가 되지도 않을 거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바뀔 거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이 없으면 절대, 아무것도 안 바뀐다.


쉽게 첫 장을 펼치지 못하고 아주 오래 뜸을 들였던 책. 진작 읽을걸 그랬다. 주변의 많은 이들도, 특히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외면하지 않고 한 번쯤, 혹은 그 이상 꼭 읽었으면 좋겠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488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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