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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Oct 28. 2019

온 세상 할머니들을 응원하며

외할머니의 "염병하네"가 듣고 싶은 밤.

박막례 할머니의 서브웨이 광고를 봤다.

https://youtu.be/J7QmkDW1IkM


박막례 님은 천상 연예인이다 싶었다. 어쩜 대사를 그렇게 빠르고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톤으로 읽으시는지. 심지어 나오는 비속어마저 매력적이었다.


한편 나는 박막례 할머니를 볼 때마다 우리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김유라 씨에게 박막례 할머니가 있듯 나에게도 할머니가 있어서일까, 아니면 구사하는 사투리가 비슷해서일까, 내 머릿속 이미지가 비슷해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외할머니는 소탈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목소리가 크고, 또 재치와 애정이 넘친다. 할머니가 해주는 요리는 유난히 달았다. 열무김치 비빔국수도 달았다. 엄마는 설탕 좀 그만 치라며 잔소리를 해댔지만,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유치원생인 나를 데리고서는 집에서 닭발을 삶고 졸여 비닐장갑 끼고 쪽쪽 먹는 법을 알려줬고, 흰 밥을 물에 말아 김치를 얹어먹는 맛도 알려줬다.

외할머니와 나.

멋쟁이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외삼촌네와 함께 사시는 동안에는 집이 가까워 자주 볼 수 있었다. 사촌오빠 사촌동생이랑 어울려 놀 겸 집에 놀러 가면 할머니 방을 자주 들락거렸다. 할머니 방에서는 희미한 담배냄새와 향 냄새와 매니큐어 냄새가 났다. 할머니 손에는 항상 진한 분홍색이나 빨간색의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었다. 할머니는 그 손으로 내 발을 주물러주기도 하고, 간지럼을 태우기도 했다. 두꺼운 반지와 커다란 귀걸이가 많아 할머니 화장대를 자주 구경했다. 커다란 반지를 껴보고는 손가락 위에서 휘휘 돌려보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삼촌네와 분가를 결정하면서부터는 자주 보지 못했다. 할머니는 전라도 광주로, 우리 집은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명절 때도 보통 친할머니 댁에만 가는 터라  잘 보지 못했다. 할머니 생신도 거창하게 챙긴 적이 별로 없다. 가끔 하는 안부전화에 "여보시오-"로 받고는 "아이고 내 사람!" 하고, "그래 건강하고이!" 이 세 마디 후 뚝 끊기는 웃긴 통화를 할 뿐이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짧은 통화에서의 할머니는 내 기억 속의, 그러니까 내가 열 살 적의 그 할머니였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에서야 겨우 보는 할머니는 볼 때마다 목소리는 가냘퍼지고, 몸짓은 작아져있었다. 당혹스럽고, 서글프고, 혼란스러웠다. 기억 속의 뻔뻔하고 억척스러운 모습이 휘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거꾸로 박막례 할머니를 떠올렸다.


그가 있기 전까지는 치매에 걸린 사람이라고 하면 꺼져갈 수밖에 없는 촛불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더 해줄 수 있는 것도, 더 할 수 있는 것도 너무나도 제한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할머니”이기만 해도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더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잊고 있었다.


하지만 박막례라는 사람을 알고 나서는 달라졌다. 박막례, 그리고 그의 멋진 파트너 김유라가 만들어낸 ‘박막례 할머니’ 채널은 어느새 구독자 100만을 돌파해 최근에는 유튜브에서 골드 버튼을 수상했다. 성장에, 발전에, 변화에 제한이 있는 나이라는 건, 체력이라는 건, 상태라는 건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켜줬다. 이제는 누군가의 할머니, 어머니보다는 박막례 본인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릴 그분 덕에, 내 할머니로만 생각했던 우리 김영이 씨를 자주 생각하게 됐다. 얼마나 호탕하게 웃던 사람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https://www.instagram.com/p/B2yvsVJALeM/?utm_source=ig_web_copy_link


한편으로는 김유라 씨가 박막례 씨에게 해준 것을 나는 김영이 씨에게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이미 약해진 할머니의 관절과 줄어든 입담에 대해 생각하며 핑계를 찾다가 다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박막례라는 사람에게 감사했다. 이런 생각을 다시고 하게 해 줬다는 점에서, 그걸 넘어서 할머니가 되어갈 우리 엄마,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한계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 줬다는 점에서, 대단하고, 고마웠다.


부쩍 할머니가 더 보고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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