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녜 May 26. 2020

코로나 시대의 여행

나의 3월, 나의 방콕

나는 들떠있었다. 출발일은 3월 첫째 주였다. 벼르고 벼르다 1월 중순쯤 예약을 했었다. 나는 두 번째, 함께 가기로 한 애인에게는 첫 번째 방콕이었다.


이번 여행은 혼자 갔던 첫 번째 방콕보다 좀 신나는 방콕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지난번엔 가지 않은 카오산로드 골목골목에서 춤을 추리라, 팬시한 루프탑 바에도 가리라, 선언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팁싸마이의 팟타이를 먹으리라, 꼭 오렌지 주스도 곁들이리라 다짐했고 몸이 습기와 땀에 끈적해질 때면 원 없이 야외 풀을 즐기리라 계획했다.

첫번째 방콕에서 맘껏 올려다봤던 야자수들.


애인과 의견이 갈리는 것은 마사지였다. 한국에 비한다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저렴하기까지 한 마사지를 나는 매일 누리고 싶었다. 지난번 여행 때도 간단한 발마사지 어깨 마사지까지 포함하면 하루에 두 번씩도 받았던 마사지였다. 그간의 피로를 없애는데 이만큼 좋은 누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매일 마사지를 받자며 들뜬 목소리로 제안했다. 하지만 애인은 심드렁했다. 그러면 전체 여행 기간 중에 한번 이상은 꼭 보자고 졸랐다. 애인은 또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러자 했다. 그 표정을 보며, 꼭 여행 초반에 받아서, 내 애인도 또 받고 싶다 제 입으로 말하게 만들겠다 결심했다.


평소 길눈도 어둡고 기억력도 짧은 탓에, 어디를 나가면 애인이 길잡이를 주로 했다. 지도도 애인이 더 잘 봤고, aka 힙한 곳들을 잘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콕은 왠지 내가 인도해야 할 것 같은, 그리고 좋은 곳을 잘 골라와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있었다. 나는 한 번 가봤고 그는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미 좋아하는 도시이고 그도 좋아해 주길 바라기 때문에, 갈 곳의 후보들을 계속 찾고, 계속 인스타와 구글맵에 저장해댔다.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여행에 떠나기 전까지 틈만 나면 방콕 카페와 bangkok cafe를 인스타그램에서 검색해댔고, authentic restaurant 이랄지 fancy bar 등의 키워드를 넣어 구글링 했다.


회사에 나보다 이른 일정으로 방콕으로 떠나기로 되어있던 동료가 있었다.

이월 초, 코로나 확진 환자가 슬금슬금 우리나라에서도 생겨나고 있다는 뉴스를 봤지만, 메르스 때도 낙타만 접촉하지 않으면 될 것 같았던 분위기를 떠올리며 나는 안일했다. 하지만 그 동료가 대뜸 자기는 방콕 여행을 취소하겠다는 것 아닌가. 덜컥 나까지 불안해졌다. 그가 건강히, 그리고 안전히 다녀오는 모습을 본다면 나도 일말의 걱정 없이 갈 텐데, 마치 코로나가 그의 탓인 것 마냥 조금 미워졌다. 그런 마음이 들수록 오기가 생겨 나는 꼭 다녀오겠노라 다짐했다. 나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란 믿음을 가슴에 꾹꾹 새겨적었다. 억울한 마음 탓이었겠지. 벼르던 휴가를 한번 가보겠다는데 설마 취소를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이 일렁였다.


한 주 한 주 시간은 흘렀다. 그 새 확진자는 늘었고 퍼져나가는 속도도 빨랐다. 아무리 버팅겨봐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환불 불가 옵션으로 싸게 구한 호텔이었지만 혹시나 싶어 메일을 보냈다. 30%나마 돌려받기로 했다. 비행기 표도 취소되었다. 애인과의 완벽한 여행을 위해 레스토랑 예약 용으로 작성해둔 드래프트 메일은 휴지통에 던져졌다.  내게 이렇게 커다랗고 엄청난 일이 와 닿을 리가 없다고, 이런 건 재난 영화나 역사책에만 있는 거라고 우겨대는, 그리고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꿈틀댔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오월 말. 이제는 그때의 내가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매일매일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왜 여행을 삼월로 예약했는지, 두 달만 더 빨리 다녀올걸 아쉬운 마음도 여전히 남아있다. 어제는 방콕에 간 꿈을 꿨다. 꿈속에서의 풍경도 지명도 죄다 틀린 방콕이었지만, 따가운 볕과 신나는 마음만은 내가 아는 방콕이었다. 거나한 여행이 아니더라도, 꿈속에서처럼 마스크 없이 맘껏 떠도는 날은 언제나 가능할는지.


어제의 확진자는 그제보다 세명 늘어난, 19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본격 글쓰기 권장 영화, 작은아씨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