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뭘 했냐면요 2: 밀린 일기를 썼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친하다고 생각하는 몇은 매일 일기를 쓴다. 그것도 몇 년째였다. 나는 그저 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한동안은 매년 다이어리를 샀지만, 1-2월이 지나면 그냥 텅 빈 종이만 남았다. 우리가 초등학생 때처럼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나 바쁜 일상에서도 일기를 쓴다는 건 그들이 글쓰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부지런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나는 글쓰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고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일기 같은 건 쓸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내가 일기 쓰기를 시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 기복 탓이었다. 남들에게 티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감정 기복이 매우 심했고, 아주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티 내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제대로 표출할 일 없이 나는 종종 예민해졌고, 슬프거나 속상해졌고, 우울해졌다. 그런 날에는 스크래치 난 마음을 되짚으며 조금 울다가 잠에 들곤 했다.
그런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호르몬 탓을 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생리가 다가올 즘에는 조금 더 자주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주기를 재어보자 싶었다. 진짜 내가 생리 때마다 우울한 거라면, 내 우울에 대해 합리화할 수 있을 테니까. 데이터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내 감정상태를 기록해야 했다. 그래서 일기를 쓰기로 했다.
일기를 쓰면서 느낀 건 매일 일기를 쓴다는 건 대단한 일이 맞다는 거였다.
내가 뭐 거창한 일기를 쓰는 것이 아님에도 그랬다. 기억할만한 일이 있었던 날에는, 그걸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일기 쓰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별 일이 없었던 날에는 쓸 말이 없어 쓰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 중간 어드메에 있는 날에는, 회상하는 것만으로 벅찬 날의 일기를 메우느라 시간이 없었다. 나도 안다. 사실은 다 핑계다. 마음만 먹으면 오 분 만에도, 아니 삼 분 만에도 뚝딱 써낼 수 있는 일기를 사실 나는 넷플릭스를 보다 잠드느라 미뤘고, 아직은 시간이 이르니 좀 더 나중에 쓰겠다고 미루다가 잊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일기를 종종 밀렸고, 일기 더미에 허덕였다.
하지만 다행인 건, 밀린 일기를 쓰면서 느껴지는 기쁨도 있었다는 거였다. 일상이 하루하루 흘러간다는데 사실은 잊히는 거였다. 밀린 일기를 뒤늦게 캘린더와 카톡과 비트윈을 뒤져가며 쓰노라면 그날의 기록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가끔 잊고 있던 창피한 일들을 되새기는 건 조금 괴로웠지만, 잊고 있던 웃긴 이야기들을 발굴해낼 때도 많았다. 그렇게 잊힌 이야기들은 소소하지만 사실은 내 평소와 아주 닮아있는 것들이었다. 괴롭고 우울한 것만 자꾸 생각나는 일상에서도 내가 ㅋㅋㅋ와 웃는 이모지를 얼마나 많이 쓰고 있었는지를 알게 됐다. 꽤 많은 시간을 즐거워하며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보다 큰 위안이었다.
내가 언제 우울해지는지, 그게 정말 호르몬 때문인 지를 알아보려고 쓰기 시작한 일기 쓰기였는데, 오히려 일기를 쓰면서 내가 언제 기뻐하는지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됐다. 나는 누가 일기 검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도 나는 슬프고 속상한 일을 고스란히 적기보다는 그날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 하루의 위안을 적어내고 있었다. 실제로 내가 나를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일이 반복되자 ‘그래도 괜찮아’라는 기분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같은 일에도 우울해하는 경우가 적어지는 것 같았다. 때로는 일기를 밀렸기 때문에, 당장의 감정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온 뒤에 적는 일기라서 그게 더 수월했다. 그렇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게다가 밀린 일기를 해치운 시점의 기분은 또 얼마나 상쾌한지. 마치 정말 내일부터는 새 인생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뿌듯함이 과장 조금 보태 발끝까지 전달되는 듯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내일부터는 정말 밀리지 않아야지, 이 힘든 일을 다시는 만들어내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나였다. 안타깝게도 같은 실수를 하루 내지 며칠 걸러 며칠씩 또 저지르고는 말지만 그래도 이제는 안다. 내가 계속 일기를 밀리더라도 나는 밀린 일기들을 어떻게든 써낼 거라고. 그렇게 잊어가던 내 평소의 소소한 행복들을 잘 기록해둘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나 자신아, 오늘은, 아니 적어도 내일은 밀린 일기를 잘 끝내보자! 그리고 밀린 일기 잘 해치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