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금요일은 연차 휴가를 냈지만 늦잠은 자지 못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따듯한 물을 마시며 온 세포의 의식을 서둘러 달래기 시작했다. 퍼블리셔스 테이블이 드디어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 작가로서 데뷔를 앞두고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분주한 아침을 시작했다. 상판을 받치는 기둥 간 균형이 맞지 않는 테이블처럼 한 쪽으로 기울어진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치뤘던 수능 날 아침이 떠올랐다. 학교 급식실에서 나왔던 흰쌀밥과 콩나물을 한 입 떠먹는 순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여러 번 떠먹다 그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벌벌 떨고 있는 그런 저릿함이었다. 십 몇년이 지나고 오랜만에 이 감각을 마주했다.
마케터이자 야구팬이 쓴 에세이
로 책을 소개했다. 광고회사에 일하는 직장인으로 어느새 육 년차가 되었다. 야구라는 존재가 어릴 때의 시선처럼 청량감 있는 사이다 같지 만은 않다. 그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라운드를 누비고 더그아웃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들이 남일 같진 않았다. 비웃었던 야구 선수의 어이없는 실책이 가끔은 내가 저지르기도 하는 일이었다는걸. 야구를 따스하게 바라보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
'마케터'
부스에 올려 놓은 책 소개 문구를 보고 보고 마케터 분들이 다가오셨다. 회사원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쓰는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일을 하지 않는 모든 시간에 활자로 머리를 채웠다. 집에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켜고 책상에 앉았다. 뇌를 180도 돌려 회사에서 사용하지 않는 뇌의 다른 면을 꺼냈다. 스마트폰을 들면 글쓰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일이 피드를 꽉 채웠다. 침대에 누워 주구장창 인스타그램 피드를 스크롤다운 하면 시간은 쉽게 흘러간다. 이 유혹을 떨쳐내야 하는데... 책상 위에 작은 물 웅덩이를 만들고 가만히 내 얼굴을 비친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그저 그런 회사원으로 밖에 남지 않을 삶을 생각한다. 기어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키보드 위에 손을 내려 놓는다.
누군가 좋아할 만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일
은 잘 짜여진 알고리즘처럼 나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회사에서도 이런 모습이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지만 가끔은 한 발, 두 발 나아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철저하게 선이 그어진 레인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수영이 아닌 바다에서 자유수영을 하는 그런 흐름을 만들고 싶었다. 머릿 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파워포인트에 옮기고 이 계획을 실현해줄 지인을 모았다. 표지 디자인, 굿즈 캐릭터 디자인, 책 편집과 제작까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과 메세지를 고민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오랜만에 리얼 '광고인'이자 '마케터'로 환기가 된다. 단순한 소감 - 힘들지만 그래도 재밌다. 잠을 줄여서라도 자꾸 하게 된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기
작년에 '룩룩잉글리시'라는 곳에서 온라인 영어 회화 수업을 들었다. 영어 외에도 생활에 도움이 되는 영상을 많이 보았는데 그 중에 'Delegation' 개념을 설명하는 영상이 인상 깊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다른 누군가가 하도록 delegate(위임)하는 일이다. 독립 출판에 필요한 일이 목록을 적고 기간 내에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철저히 나눴다. '조금이라도 더 하면 좋아질텐데'란 마음은 수시로 들었지만 이를 꽉 깨물고 할 수 없는 건 과감히 버렸다. 계속 안고 가다가 페어 당일 부스에 설 수 없을 정도로 컨디션이 나쁠테니까. 더 신경써줄걸 하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었지만 완성을 위해 단호함을 유지했다.
생각과 감성을 표현한 사적인 글이지만 회사원의 티는 못 벗은 건지 프로젝트 하듯 '수행'해버렸다. 이런 작업 과정이 책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다. 그래도 나는 나니까, 내 태도와 방향으로 나만의 세계를 만들겠지. 그 세계로 사람들을 많이 불러들이고 싶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언젠가 내 프로필을 쓰게 된다면 데뷔일을 꼭 11월 11일, 퍼블리셔스테이블로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