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우니 수도관을 잘 관리하시오’라는 알림이 하루를 거르지 않고 온다. 시베리아에 쌓여 있던 찬 공기가 한반도로 쏟아지면서 매일 영하 10도를 기록하는 매서운 겨울이라고 한다. 찬 기운이 들어오는 모든 경로를 창문 틈막이와 뽁뽁이로 꼭꼭 틀어막는다. 베이지색 극세사 이불을 둘러 싸매고 노트북을 켠다. 지구 온난화로 기상이 이전과 같지 않아 지구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아이러니하게 이불 속에서 보는 TV 프로그램은 재미있다. 매주 월요일 JTBC에서 방영하는 ‘최강야구’라는 프로그램 덕분이다. 평소 유튜브나 넷플릭스만 기웃거리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유일하게 밤 열 시 반이면 동생과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화면 앞으로 모인다. 최강야구를 꼬박꼬박 챙겨 보는 일은 나 뿐만은 아니었다. 작년 11월 퍼블리셔스 페어에서 만난 많은 독자분도, 입고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방문했던 서점의 사장님도 이 프로그램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야구팬들의 가슴에 최강야구가 불을 지피는 요즘이다.
‘최강야구’는 프로야구를 은퇴한 선수와 대학에 다니는 일부 아마추어 선수로 구성된 ‘최강 몬스터즈’라는 야구팀이 주인공이다. 몬스터즈가 전국 각지에 있는 고등학교, 대학교 등 아마추어팀과 경기를 펼치는 여정을 방송으로 보여준다. 선수단의 구성원은 박용택, 정근우, 유희관, 장원삼, 송승준 등 야구를 좋아한다면 들어 봤을 지금은 은퇴한 선수들이 주축이다. 은퇴한 선수지만 야구계에서 쌓아온 노하우나 야구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젊은 아마추어팀들과 대결해도 밀리지 않고 오히려 제압하기까지 하며 멋진 승부를 보여준다.
야구를 보면서 이렇게 마음이 편해도 되는지 되묻는다. 몬스터즈 팀의 승리에 상관없이 경기 자체를 보는 일이 즐겁다. 순위 싸움을 하지 않으니 패배의 원인을 선수나 감독, 또는 누군가에게 돌리며 부정적인 기운을 드러내지 않는다. 화면 너머이지만 더그아웃에 대기하는 선수들도 나와 같은 마음처럼 보인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야구 경기를 즐긴다.
프로야구 정규시즌 144경기에 늘 보던 다 아는 얼굴이 아니라 낯선 선수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전국 고등학교와 대학의 야구부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이 등장한다. 프로 경기에서 보지 못한 폼으로 공을 던지거나 끈질기게 대결하는 팀의 특색을 보여주는 작전이 펼쳐진다. 특히 조만간 프로 야구 선수로 데뷔를 찜한 선수를 보는 재미가 있다. 작년 충암고등학교 야구부와 대결 시 선발 투수로 활약했던 윤영철 선수가 기억난다. 윤영철 선수는 당시 아마추어 선수 중에 Top 3에 드는 뛰어난 선수였다. 내가 응원하는 기아 타이거즈는 전년도 리그에서 9위를 기록한 덕(?)에 이 선수를 지명할 가능성이 높았다. 미래의 우리 팀이 될지 모르는 새싹을 바라보며 2023년을 좋은 성적의 행복 회로를 돌렸다.
무엇보다 최강야구에는 스포츠 청춘 성장 드라마 그 자체의 낭만이 있다. 아직 세상의 조명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선수가 은퇴한 선수와 만나며 서로 성장한다. 프로의 세계를 떠나왔지만, 여전히 건강한 루틴(습관)을 유지하고, 부족한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부지런히 연습한다. 야구를 향한 진심인 마음과 절실한 태도까지, 역시 ‘프로’ 출신이다. 방송은 경기 장면을 위주로 보여주지만, 가끔 선배와 아마추어 선수가 마주하는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후배가 야구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를 하는 첫 만남, 모자를 벗으니 드러나는 까무잡잡하게 탄* 피부와 애 땐 얼굴. 아마추어 타자가 안타를 치고 1루에 도착하면 1루수 선배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선배의 격려에 프로 세계로의 꿈을 반짝거리는 눈빛, 그때 햇살이 비치면서 푸른 야구장 잔디밭과 파란 하늘로 시선을 옮기는 렌즈,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고 싶었던 야구였다.
최근에 김성근 감독님이 부임하며 낭만 야구의 재미가 더해졌다. 김성근 감독님은 한국과 일본 야구계에서 활약하며 ‘야구의 신’, 야신이라 불리는 분이다. 연세가 벌써 80대이시지만 연습 시간에 타자들에게 공을 던져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과거에 선수를 과도하게 훈련하거나 선수를 혹사하며 경기에서 이기는 방식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하지만 선수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은 선수 지도를 코치에 맡겨 두지 않고 본인이 직접 필드에 올라와 함께 훈련한다. 얼마 전 방송에서도 “여러분은 프로 출신이고, 현재도 프로다. 돈 받고 하고 있다. 돈 받고 한다는 것은 프로라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철학을 말하는 야구 선수나 스태프가 흔치 않기에 반가웠다.
방송을 보는 내내 귓가에 아른거리는 노래가 있었다. 인디 밴드 ‘델리스파이스’가 부른 ‘고백’이다. 이 노래는 일본의 만화 야구 H2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H2는 일본의 고교야구를 다루는 만화로 90년대에 발간했다. 이 만화를 끝까지 다 보지는 못했지만, 고등학교 야구부의 풋풋함과 청춘의 뜨거운 열정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요즘의 최강야구가 그렇다. 주말에 다 풀지 못한 피로 탓에 회사에서 흐느적 그런데도 월요일이 기다려지는 이유, 최강야구를 오래오래 보고 싶다.
*여담을 덧붙이져면 '최강야구' 포스터 속 인물이 박해수 배우로 자주 헷갈린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야구 선수 역할을 맡았는데 딱 그 느낌이라 자주 착각하는데... 나만 그러는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