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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녕 Jun 30. 2022

매일이 9회말 투아웃

당신의 회사 생활은 몇 회 쯤인가요?

'9회 말 투아웃'은 단어만으로도 야구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순간이다. 투수가 아웃 카운트 한 개만 더 잡으면 경기가 끝나는 ‘퇴근 1분 전’ 이기도 하지만, 타자 입장에서는 홈런이나 안타 한 방을 치면 역전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9회 말 투아웃 1점 차로 지고 있는 와중에 쓰리 볼-투 스트라이크 풀 카운트


지금부터 타자는 투수가 던지는 공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이 공을 칠 지 말지 판단해야 한다. 무작정 방망이를 휘두르다 헛스윙을 하게 되면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이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아깝게 놓치게 된다. 관중석과 화면 밖의 시청자도 그를 주목하고 있다. ‘퇴근 스윙이다’, ‘네가 그렇지 뭐’, ‘돼지야. 연습 좀 더 해라’ 비하와 조롱 섞인 매서운 댓글이 선수에게 날아온다. 이미 점수는 지고 있지만 마치 이 선수가 못해서 패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잘해도 본전인 무척 억울한 상황, ‘졌잘싸’를 노릴 수밖에 없다.


나는 유독 9회 말 투아웃 상황이 오면 팬이 아닌 선수에 감정 이입하게 된다. 여느 때라면 선수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환호하고 아쉬워하며 욕도(?) 하겠지만 이 순간만큼 비장 모드이다. 타자가 서있는 연갈색 흙바닥의 타석은 강남역 앞 빌딩의 카페트로 바뀌었고, 나는 사무실 책상 앞 내 자리에 앉아 있다.  


 우리 회사 사무실은 매우 넓은 공간에 기다란 책상이 쭉 나열되어 있고, 사람 간 자리가 구분될 정도의 역할을 하는 어깨높이의 낮은 파티션들이 있다. 칸막이가 높지 않으니 무엇을 하는지 다 보이고, 나의 말이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진다. 이제 자리에 앉아 앞뒤 양옆으로 날아오는 윗분들의 업무와 피드백을 기다린다. 마치 야구장의 필드에 서 있는 것처럼 모두가 날 지켜보는 상황.


사 사람들은 모르는 척하지만, 사실은 사무실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알고 있다. 눈은 각자의 노트북에 고정되어 있지만 귀는 서로에게 열려 있는 상황, 누군가 화를 내고 윗사람에게 혼이 나고 휴우~ 한숨 쉬는… 부정적인 소리는 특히 더 잘 듣는다. 그래서 사무실은 오십 명의 관중석으로 둘러싸인 야구 경기장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업무 환경이 냉정하고 치열하다. 나는 광고주와 협력업체를 이끌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여러 사람과 동시에 커뮤니케이션을 하니 늘 머리 위에 수십 개의 말풍선이 둥둥 떠다닌다. '6월 말까지 이 일 다 끝낼 수 있나요?' 마감에 자주 쫓기고 비용을 줄이라는 압박은 덤이다. 그래서인지 다들 바쁘고 여유 없어서 대화가 잘 통하지 않으면 금방 ‘일못’**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질문과 답변들이 나를 향해 날아온다. 투수가 던지는 공처럼. 마감을 독촉하는 질문은 받아치기 어려운 159km의 속도가 빠른 돌직구, 프로젝트 비용을 깎으려고 나를 떠보는 질문은 변화구. 모두 배려 따윈 없는 공이지만 좋은 성과를 내야 한다.


일의 규모만큼 책임도 참 컸다. 협력업체와 일할 때는 긴장이 배가 되었다. ‘갑’이라는 위치가 조심스러웠다. 내 결정에 따라 열 몇 명이 되는 사람들이 밤을 새워서 일을 다시 해야 했다. 빨리 결과물을 달라고 독촉하고 화내는 말을 많이 해서 칭찬이나 감사 같은 건 잃어버렸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마음 편히 잠들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입사 후 일이 년 동안 이런 상황을 경험하면서 트라우마가 생겼다. 잘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감. 늘 9회 말 2아웃의 타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기분.


그런데도 누군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좋은 결과를 낸다. 마지막 순간 끝내기 안타를 치며 승리에 공헌한 선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끝까지 집중해서 승부했더니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집중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같은 모범 답안처럼 들린다. 분명히 중요한 메세지이겠지만 곰곰히 생각해 볼 여유가 부족해보인다. 여전히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기에 마음이 바쁜 순간의 연속, 아직은 매일이 9회 말 투아웃이다.  

 

**내가 일하는 회사는 서로의 호칭을 직급 대신 ‘프로’로 사용하고 있다.

***일 못하는 사람의 줄임말.


*참고 야구 경기 영상

2022년 5월 10일, KT:KIA 경기에서 마지막 소크라테스 선수의 끝내기 안타로 1:0 승리한 기아 타이거즈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vod/index?id=940106&category=kbo&gameId=20220510KTHT02022&date=20220510&listType=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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