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 유니폼 말고 없나요?
여자 야구 팬으로서 할 말이 있는데요
내가 야구팬이라고 야구와 나의 사이에 항상 맑은 날만 있지는 않다. 친한 친구와도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이 야구라는 거대한 세계는 가끔 나를 실망시키곤 한다. 특히 선수, 코치, 감독, 프론트 등 구성원의 대부분이 남성으로 이루어진 야구계에서 여자팬으로서 차곡차곡 쌓아온 할 말이 많다.
약 십 년 전부터 프로야구 구단들은 여성 관중을 늘리기 위해 ‘레이디스 데이(Lady’s Day)’ 같은 이벤트를 열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야구팀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두며 새로운 관중이 야구장에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여성 팬도 대거 유입되면서 구단에서는 이 사람들이 야구에 계속 관심을 두고 팬으로 묶어 두기 위한 마케팅을 펼쳤다. 돌이켜보니 이즈음에 나도 대학에 입학하고 서울로 오면서 입시 공부로 미뤄두던 야구를 다시 보기 시작했었다. 야구에 큰 관심이 없던 학교 친구들이 선뜻 잠실 야구장에 같이 가며 야구의 장벽이 낮았던 기억이 난다. 죄다 남자인 야구판에서 여성 관객을 위해 뭐라도 한다고 하니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구단 SNS를 통해 유니폼을 보기 전까지는.
「여성들이 좋아하는 분홍색 유니폼을 발매했다.」
이게 최선인가. 어차피 야구판이 생각하는 정도가 거기서 거기지. 의사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죄다 남자니까. 98년도의 어린이날, 부모님과 장난감 가게에서 듣던 여자는 분홍색, 남자는 파란색이라는 직원의 설명이 떠올랐다. 어른이 되면 알게 된다. 세상에는 좋아할 수 있는 색깔의 종류가 66색 크레파스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 무렵부터 연두색, 라임색 같은 여름의 나뭇잎 색이 좋았다. 열일곱 새로 장만한 연두색 뿔테 안경을 쓰고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선서하며 새싹 같은 새록새록 함을 꿈꾸었다. 그런데 다 큰 성인 여성에게 핑크라니요.
지하철 임산부 좌석, 여자 화장실을 안내하는 표지판 등 여전히 공식적으로 여자를 상징하는 색깔은 분홍색으로 표기한다. 굳이 야구 유니폼도 대수일까 생각해본다. 좋아하는 마음만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서 그만큼 실망도 크다는 덕질 명언이 떠오른다. 여성 관객을 위한 날이라며 분홍색 유니폼을 들이미는 일차원적 단순함이 미웠다. 야구를 볼 때 진짜 여자들이 어떤 불편함이 있는지 알까.
일부로 응원석이 보이지 않는 자리로 예매하려고 한다. 신나게 응원하게 흥 스트레스는 풀리겠지만, 치어리더는 보고 싶지 않다. 관중들의 흥을 돋구고 열정적으로 춤추는 그들의 노동을 비하하려는 말은 아니다. 야구 관중석에 남자와 여자가 거의 반반 채우고 있으며, K-POP 아이돌 덕질에 익숙한 여자 팬은 굿즈 구매에도 고민 없이 지갑을 연다. 그렇지만 여전히 야구장의 유일한 여성 구성원은 치어리더이다. 남성향 게임 캐릭터처럼 얼굴은 아이 같고 큰 가슴은 부각되는 괴이한 옷을 입는다. 딱 달라 붙는 옷은 혈액 순환에도 좋지 않고 격렬한 움직임에도 적합하지 않은데 왜 스타일을 유지하는지 의문이 든다. 심지어 야구는 어린이들의 꿈이라는데, 애들이 치어리더를 보면서 바람직하지 않은 성 고정관념이 생길까 걱정스럽다. 몇몇 치어리더 개인의 옷차림 문제가 아니라 야구 업계가 그 스타일을 바꾸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TV로 야구 중계를 봐도 여전히 30대 중반 이후의 야구선수 출신이나 40대의 남성 아나운서 캐스터가 자리하고 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뻔하다. 여전히 여성은 야구를 잘 모르고 외모가 뛰어난 특정 야구선수를 보러 야구장에 왔다고 쉽게 말한다. 중계 카메라는 만 명이 넘는 관중 속 예쁜 여자를 집중적으로 렌즈에 담는다. 관중 속 잘생긴 남자를 비출 때는 경기 날 시구를 하러 왔거나 경기를 보러 온 연예인 뿐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며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야구계는 계속 같을 것이고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며 이미 패배를 장담하는 태도는 내 것은 아니다. 야구가 더 많은 사람에게 환영받길 바란다. 한 명의 팬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공감해준다면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나은 방향으로 풀릴 수 있으니까. 남녀 모두를 포용하는 태도는 팬들에게 외면받아 고민인 야구계에 가장 필요한 처방전이다. 나는 야구에 간신이 되고 싶지 않다, 충신으로서 직언하려고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