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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12. 2022

삶의 무게를 보는 사람이고 싶다

문득 과거의 연인과 나누었던 대화들, 느꼈던 감정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오빠는 엄마 어떤 점이 좋아?”

“없어. 그냥 불쌍한 사람이야.”

“그래도 좋은 게 없다고? 한번 생각해 봐 봐.”

“...”


“오빠 친구는 어떤 사람이야?”

“그냥 멍청해.”


“내 장점은 뭐야?”

“(장난스레 웃으면서) 없어.”


나와는 반대되는 성향을 가졌던 남자. 다른 부분에서는 논리 정연하게 자신의 의견을 잘도 말하던 사람이었기에, 누군가와 오랜 시간 관계 맺으며 장점 하나 말하는 못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은 연애가 깊어지면서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야. 한번 봐봐.”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마음’에 관한 강의를 보여주었다. 유심히 강의를 보더니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어서 자신의 논리로 허점을 짚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가 볼 수 없는 관점으로 보는 눈이 신선했다. 하지만 점차 맹렬하게 비판하는 그의 이야기를 가만 듣다가 내 가슴이 거무스렇게 멍드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혀왔다.


아마도 ‘마음’에 관한 강의가 그의 마음을 건드린 듯했다. 쏟아내는 말 아래 자신이 살아오면서 받았던 상처와 채우지 못했던 결핍의 분노가 가득 묻어났다. 처음엔 그 사람이 가진 상처가 내 마음을 움직였고, 그가 가진 ‘아픔’을 보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의 마음속 깊이 똬리를 튼 분노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이 사람 마음 안에 해결되지 못한 게 많구나. 그래서 다른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구나..’

그 무렵, 그의 분노는 사사건건 갈등을 만들었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돌아보면 나란 사람은 곧잘 누군가의 어두움에 끌렸던 것 같다. 타인과 함께일 때는 밝고 웃음도 많았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에서는 상실, 이별, 고통, 아픔, 죽음의 이야기를 탐했다. 그렇게 슬픔과 우울에 빠져들다 보면 그것들 안에 숨겨진 인간의 회복력, 생의 힘을 발견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온몸에 전율이 흐르며 축복 같은 감정을 맛보곤 했다.


누군가에게서 묘하게 슬픈 매력이 느껴지면 한번 더 눈길이 갔다. 그 사람이 가진 삶의 무게를 짐작해보고 그가 가진 아픔을 나누고 보듬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애를 시작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내 안에 구원자 욕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번의 연애 끝에 스스로 해결되지 않은 아픔은 정신과 의사나 심리치료사의 몫이지 내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더 이상 슬픈 매력에 끌려 만남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삶의 무게’를 보는 사람이고 싶다. 아름답고 온전한 것만 내보이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저마다 상처받았고, 저마다 마음 아파하며, 자신의 삶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내보인 민낯에 기꺼이 위로하고 공감하는 사람이고 싶고, 나 역시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싶다.


오늘도 나를 나답게 하는  삶에 감사하며 희망의 빛을 보며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본다. 더불어, 많은 이들이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디어갈  있기를, 자신의 아픔을 성숙하게 이겨내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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