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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12. 2022

'사랑합니다' 말 앞에서 당당한 삶

'황천행 열차'라는 연극을 보았다. 죽음을 앞두고 저승을 가기 전 '잠시만 역'에 하차하여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을 전한다. 주인공들은 저마다 남겨진 부모님, 아내, 딸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뻔하지만 그보다 진실할 수 없는 메시지를 전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했다.


연극이 막바지로 향하면서 관객들에게 인생의 마지막 순간, 소중한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도록 유도했다. 연극의 여운 덕분에 쉽게 상황에, 감정에 몰입할 수 있었고, 나 역시 죽기 전 마지막 유언 비스무리한 이야기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나의 대상은 부모님이었다. 그들에게 어떤 마지막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으레 마지막을 앞두고 '사랑한다'라는 말이 떠오를법한데 선뜻 그 말이 내뱉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말이라도 해야 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 마음이 이야기하는 바를 천천히 적어나갔다.


'엄마, 아빠. 내 삶은 나의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것들을 회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어요. 덕분에 나의 상처, 결핍을 보듬을 수 있었고, 그러면서 감사를 배웠고, 그러면서 평안을 얻었어요. 때때로 미웠지만, 그래도 나를 존재하게 하는, 날 살아가게 하는 소중한 나의 부모님이었어요. 당신들이 내 삶의 이유였어요. 이 생에서 나의 부모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내가 적은 메시지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보았다. 진심을 담아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한스럽고 가슴 아프게 다가오던지 마음이 시렸다.


따뜻함, 안정감, 편안함, 표현으로 알 수 있는 애정과 관심, 위로와 지지가 되어주는 말 한마디. 비록 나의 원가정에서는 채울 수 없었지만 내 자식들에게 또는 내가 관계 맺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는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 그렇게 간절하게 열망하던 것. 내가 새롭게 배우지 않는다면 쉽게 가질 수 없는 것.


20대 후반, 내가 가진 상처와 결핍을 하나씩 꺼내보기 시작했다. 나를 다시 보았고, 나의 부모를 다시 보았다. 그들의 언행이 내게 미쳤던 영향을 곱씹고 끝없이 올라오는 감정들에 푹 빠져 정처 없이 방황했다. 분노의 눈물을 흘리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안쓰러움의 눈물을 흘리다, 서서히 받아들임의 눈물이 흘렀다. 다시는 꺼내보고 싶지 않았던 밑바닥의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또 끄집어내었고, 나를 두렵게 하고 불안에 떨게 하던 감정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차오르기만 하던 나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며 서서히 내 안의 변화가 찾아왔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삶인데 그 시간을 미움과 원망으로 채우는 삶, 그리고 죽음 앞에서 후회하는 삶이 견딜 수 없이 안타까웠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타인과도 사랑할 수 없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사람들을 보며, 건강한 사랑을 주고받지 못해 단절되고 고립되며 사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하는 언행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다.


'여러분, 우리 제발 그러지 마요. 우리 그렇게 살지 마요. 한 번뿐인 인생, 덜 후회하며 더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요.' 그러한 외침이 내 안에 가득 찼고 메아리가 되어 내 안에 맴돌았다. 어느 순간, 이러한 외침이 아니고서야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외침은 내가 상담자가 되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앞으로 펼쳐질 내 삶이 궁금하다. 부모님의 죽음을 앞두고, 혹은 나의 죽음을 앞두고 나는 당당하게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될까. 혹은 먼 미래, 내 아이에게서 '엄마, 사랑해요!'를 당당히 들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있을까. 지금으로서는 확답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금보다는 '사랑해요'라는 말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것이라는 것. 잘 살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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