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선생님, 저는 동생이 네 명이나 있어요. 그래서 제 물건을 모두 물려줘야 해요. 갖고 싶은데 가질 수가 없어요. 그리고 언니라서 다 챙겨줘야 해요."
유진이는 왕언니로서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했다.
"왕언니로서 어깨가 무겁겠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대꾸했더니,
"맞아요! 휴.." 하며 지친 몸짓을 내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지친 몸짓과 상반된 신이 난 어조로 자신의 관심사인 피아노와 동생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끼다보니 이야기가 명확하지 않았다. 어정쩡한 추임새와 잠깐의 감정을 읽어주었을 뿐인데 신이 나서 종알종알거리는 유진이였다. 이대로라면 오늘 하루종일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던 찰나, 유진이의 부모님이 찾아왔고 유진이는 인사를 남기고 슝 가버렸다.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을 한 첫날의 일이다. 만나본 적 없는 초등학생 1~3학년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선생님으로서 잘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한가득이었는데, 마음과 달리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나에게 다가와주었다.(물론 낯을 가리며 표현하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그날 밤, 아이들의 종알거림을 되새겨보았다. 그러다 과거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고, 책을 뒤적거렸다.
사람들은 가끔 몸속에 이야기가 가득 찬 생명체처럼 보인다. 그 생명체는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간절히 열망한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을 만나는 순간 사람들은 비를 머금은 식물처럼 싱싱하게 자라나기 시작한다.
- 김형경 에세이 <소중한 경험> 중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며 느낀 바, 오늘을 되돌아본 바, 맞아! 정말 사람은 몸속에 이야기가 가득 찬 생명체야. 하고 맞장구를 쳤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어쩌면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고, 할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어딘가 나의 이야기를 판단하거나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온전히 있는 그대로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존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샌가 나의 이야기가 나를 판단하는 잣대가 되고, 나의 이야기로 누군가 피해를 입고, 화살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경험하면서 선뜻 나를 내어놓기를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며 그렇게 연결을 잃어가고, 외로워지며, 고립되는 것은 아닐까.
무수한 관계를 맺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잘 듣고 싶다는 마음을 되새긴다. 잘 듣고 싶다. 상대의 이야기로 누군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잣대로 삼지 않기를, 상대의 이야기에 나의 프레임을 덧씌우지 않기를, 끝없이 나를 성찰하며 듣는 삶을 지속하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주에도 아이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귀기울이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나의 다짐과 노력으로 아이들이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아이들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결실로 맺어진다면, 나의 눈과 귀, 마음을 모아 그들에게 기울였던 관심이 풍성하게 꽃 피우게 될 것이니, 그것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