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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30. 2022

노란 화살표 따라 걷다

‘인생에서 잊지 못할 추억거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때면 어김없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럴 때면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같다.

“부러워요. 멋있어요.”

그런 반응을 만날 때면 정말이지, ‘세상사 참 아이러니하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018년 초봄, 배낭하나 짊어지고 프랑스 생장피데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거쳐 피스테라까지 42일간 900km를 걸었다. 결과적으로 내 삶에서 선물같은 시간이었지만, 시작을 앞둔 그때의 나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이곳에 있다가는 나를 해칠 것 같은 두려움에, 도망치는 마음으로 떠난 길이었다.


내 삶의 어느 한 시기, 나는 울보가 되어 있었다. 작은 말 한마디에 감동받아 울고, 작은 말 한마디에 상처받아 울고, 작은 자극에 몰입되어 이상한 소설을 써가며 울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그냥 주르륵 눈물이 났다. 이런 내 모습에 나조차도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밝고 활달하다는 과거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이 지나가는 개미만도 못한 보잘것없는 하찮은 존재로 느껴졌다. 막막하고 암담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 나를 방치해두면 내가 나를 해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렇게 걷게 된 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만났다.

나의 첫 여자였던 엄마와 첫 남자였던 아빠, 첫 울타리였던 나의 가정을 떠올렸다. 29년 그동안 살아왔던 내 삶을 반추했다. 내 삶에 스쳐 지나간 무수한 인연을 떠올렸고, 경험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내가 소망했던 것들, 소망하는 것들을 떠올렸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억압된 무언가가 한꺼번에 분출되듯, 하염없이 울다가 걷다가 울다가 걷다가를 반복했다. 울다 지쳐 문득 뒤돌아 마주친 풍경에서 황홀감을 맛보며 잠시 넋을 놓고 위로받기도 했다.

 

그곳에서 참 다양한 인연들도 만났다.

각양각색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그들을 길위에서 만났다. 함께 걸으며 그간 살아왔던 인생 스토리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상실, 애도, 시작과 끝, 휴식, 도전, 다양한 주제어를 가지고 길 위에 선 그들의 이야기가 날 위로했다. 은퇴 후, 삶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앞둔 어른들도 만났는데, '저렇게 늙어야지' 본보기가 되어주는 어른들도 있었고,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반면교사 되어주는 어른들도 있었다. 너무나 어른으로 보였던 그들에게서도 느껴지는 불안을 감지하고선, 불안은 평생 친구처럼 함께해야 할 감정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어떻게 늙고 싶은지, 진정 원하는 삶의 모습은 어떠한지, 어떤 소명을 가지며 살아야 하는지 그들과의 만남이 나를 확장시켰다.


그리고 그곳엔 항상 노란색 화살표가 있었다.

길바닥에, 돌에, 나무에 그 어디서나 노란 화살표가 날 이끌었다.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 당황스러워할 때, 어김없이 보이는 노란색 화살표가 나를 안심시켰다. 앞으로 내 인생길에도 이렇게 노란 화살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막막함과 암담함에 휩싸여 방황하던 나에게 노란 화살표 따라 걷던 그 길이 참위로가 되어주었다. 살다가 길을 잃을 땐, 또 이 길을 걷자 다짐했었다.


그렇게 길을 걷고 왔다.


되돌아보면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사건이 나에겐 노란 화살표였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치듯 떠났던 순례길이, 많은 눈물을 흘리며 나 스스로 회복할 수 있었던 그 시간이, 다양한 인연을 만나 확장되었던 그때가, 내 삶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커다란 화살표였구나 싶다.


그 화살표에 힘입어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요즘, 내가 이렇게 단단해졌구나 새삼 놀라움과 감사함이 있다.


매일매일의 일상, 사사로운 선택 앞에서 고민하게 될 때면 어떤 게 노란 화살표일까 내 삶을 면밀히 살펴본다. 책에서 만난 한 문장, 누군가의 말 한마디, 흘려보내지 않고 곰곰히 되새겨본다. 조그마한 관심을 기울인다면 분명 자잘한 노란 화살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서.


순례길을 걸으며, 매일매일 도착하는 알베르게 방명록에 새겼던 문구가 있다.


"세상이 좋다 하는 가치에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중심을 찾을 수 있는 여정이 되길."


참 열심히도 새겼기 때문일까. 이제는 한결 내 삶에 중심이 선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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