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버티거나 달아나거나
명절에서 탈출한지 몇 해 되었다. 첫 해엔 아침 이른 시간 스타벅스에 앉아 말할 수 없는 감정에 기꺼이 휘말려 한동안 달콤했다. 오늘 아침, 팔순의 어머니는 성묘 갈 채비를 하고 있고 나는 한 시간 가량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다가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로 가는 거리는 한산했다. 버스 안엔 한 나이든 여자가 짐꾸러미를 든 채 앉아있었고 나뿐이었다. 작업실 1층 스타벅스엔 여러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추석날 아침, 나는 마치 이 세상에 유일한 사람, 최후의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늘 읽을 책과 노트북을 올려놓고나니 문득 다른 여자들이 생각났다. 몇 남지 않은 친구들은 제사 대신 해외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반려견과 놀거나 유튜브, 넷플릭스 등 다양하게 즐길 것이다. 우리 식구 먹을 거만 장만하면 되니까, 하며 재래시장에서 간단한 장을 봐 온다는 친구가 있고 그것조차도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명절이면 습관적으로 오래전, 그러니까 삼십 년 전쯤을 떠올린다. 미신과도 같은 신념으로 어마어마한 제수를 장만하고 그저 뒷담화하며 시기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보내고 나면 명절 사흘이 꼬박 지나갔다. 그 때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다, 하는 이상한 감정에 휘말리곤 했다. 평소에도 간절했던 그 감정이 명절이면 더욱 끓어오르곤 했다.
지금에야 생각하니 그건 과장된 말의 소비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세속적인 언어의 난무, 속물성의 과잉이 견딜 수 없었다. 사회적 성공과 부의 축적, 가족 이기주의, 보신주의의 자장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한계를 지켜보는 것이, 가끔은 나또한 합류하여 좋은 게 좋은 거다, 뭐니뭐니 해도 가족뿐이다, 조상 섬겨서 나쁠 것 없다, 하는 말을 보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인간의 자존이니 인간성 실현, 공동체로서의 도덕성이나 기준이 혼란스럽게 엉켰다. 설마 이거 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겠지? 하나도 확장되지도 성장하지도 못한 채 기복만 바라다가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며 우울했다.
오늘 여자들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나처럼 혼자 있고 싶다, 하는 감정이 드는 여자들이 있을까. 부디 고통스럽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