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김여인
할머니는 하루 종일 수부에서 사람을 받고 바쁠 때는 청소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또 다른 여관을 물색하러 다녔다.
할머니는 1층 수부에서 생활하였다. 가끔은 병원에 있는 큰아버지를 데리고 와서 함께 있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객실이 있는 건물 층에서 큰아버지가 연인들이 들어오면 증세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큰아버지가 마구 낄낄대며 웃어대어 손님들은 기겁을 하고 여관을 빠져나갔다.
할머니는 수부실에서 하루 종일 손님을 받느라 할아버지는 또 혼자 자야 할 형편이 되었다. 방앗간을 할 때도 아내를 실컷 품어보지 못했던 할아버지는 결국 여관에서조차 다른 연인들의 애정행각을 대리만족 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외로움에 지친 할아버지는 결국 사고를 쳤다. 미자이모 대신 이번엔 할머니의 친구를 건드린 것이다. 김여인은 할머니의 고향 친구였다. 할머니가 친구를 위해 한 선의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할머니는 김여인에게 할아버지 몰래 돈을 빌려주었고 그 돈은 몽땅 김여인 남편의 노름으로 탕진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는 돈을 돌려받기 위해 김여인의 집으로 달려갔고 그때 할아버지는 방 안에 처참하게 구겨진 채 앉아 있는 김여인을 봤다. 할아버지는 미자이모와 겹쳐져 보였을까, 김여인에게 흑심을 품게 된 것이다. 도박빚만 남기고 도망간 남편 대신 볼모로 잡혀온 김여인은 청소부를 하면서 빚을 탕감하려고 왔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를 유혹하는 데 성공하였다.
할머니가 큰아버지의 병원을 가거나 장을 보러 가거나 하면 할아버지와 김여인은 그 많은 방을 놔두고 이 별채로 들어와 밀애를 나누었다. 김여인은 더러운 여관을 청소하는 일 보다 쉽게 돈을 갚는 방법을 택했다. 몸으로 빚을 갚아야 하는 굴욕적인 일이었음에도 김여인은 그 어떠한 수치스러움도 갖지 않았다. 오히려 힘들었던 것은 할아버지 쪽이었다. 할아버지는 김여인이 채무자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돈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여자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김여인은 퇴실한 방을 청소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듣기 위해 벽에 귀를 갖다 대기도 하였다. 여자는 자지러질 듯 교성을 질렀고 남자는 사정을 하는 순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러느라 청소가 늦어지면 할머니가 소리쳤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지금 손님이 나가잖아.”
김여인은 정액냄새와 땀냄새가 채 빠져나가지 않은 방을 청소했다. 이불과 베개가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는 축축하고 눅눅한 침대 시트를 손바닥으로 매만지곤 하였다. 체모와 머리카락, 그리고 살비듬과 정액, 체액이 번져있는 시트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황홀했겠지? 뼈가 허물어지도록 달콤했겠지? 슬픔이 녹았겠지? 죽을 것 같았겠지?’ 김여인은 청소가 아니라 침대 위에서 사내랑 뒹굴고 싶었다. 결국 김여인은 할아버지와 뒹굴었다. 그들 사이를 눈치챈 할머니는 김여인을 내보내자고, 친구 사이조차 망칠 수는 없다고, 못 받은 돈은 잃어버린 셈 치자고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김여인의 호리호리한 몸매와 상냥한 말투까지 천생 여자냄새를 풍기고 있는 김여인에게 빠진 할아버지로서는 할머니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김여인은 남편이 진 빚을 이미 변제하고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초원장을 떠나지 않았다. 김여인은 할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일말의 죄의식에 사로잡히기도 싫었고 무엇보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그림자처럼 숨기는 것도 싫었다. 눈물 많고 겁이 많았던 김여인은 갈수록 뻔뻔해졌다. 김여인은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자꾸 백화점에 같이 가자고 하네. 오늘 청소도 다 못했는데.”
짙은 화장과 화려한 옷에 양산을 든 채 할아버지 차에 올라타며 김여인은 할머니에게 말했다. 김여인은 더 이상 청소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들어온 사람이 바로 바람댁이었다. 바람은 많은데 돈은 없는 동네에서 도망쳐왔다는 오십 대 후반의 여자를 할머니는 바람댁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통보했다.
“이제 나는 따로 나가서 살겠어. 돈은 아침에 수금하러 올 테니 한 푼도 빼돌릴 생각하지 말아.”
할아버지는 새로 인수한 목욕탕에 거처를 옮겼고 김여인 또한 그곳으로 따라갔다.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하루하루 수입을 거둬갔다. 할머니는 단 돈 한 장 몰래 숨기는 것 없이 고스란히 할아버지에게 바쳤고 그 돈은 김여인의 진주목걸이나 값비싼 옷으로 바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고가 일어났다. 할아버지의 옆자리에 타고 있었던 김여인은 고급 승용차에 타고 있는 자신의 신분상승에 도취된 나머지 오른팔을 달리는 창문 밖으로 내민 채 한껏 기분을 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맞춰 준 옥빛 실크 블라우스가 바람에 부드럽게 감겼다. 김여인은 집을 나간 남편에게 오히려 감사해하는 마음에 대한 죄책감마저 벗어던지고 한껏 귀부인의 기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의 백미러가 행복의 절정에 있었던 김여인의 팔을 치게 되었다. 김여인은 팔이 잘리면서 갈비뼈가 부러졌다. 이것을 알게 된 김여인의 남편은 당시에 있었던 간통죄로 그들을 고소하였다.
할아버지는 고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목욕탕이 딸린 5층짜리의 건물을 통째로 김여인의 남편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김여인은 팔만 잃은 게 아니라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마저 상실했던지 아무 미련 없이 남편에게로 돌아갔고 무능력한 그 남편은 바람난 아내 덕에 순식간에 졸부가 되었다. 치욕과 배반감에 치를 떨며 할아버지는 초원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큰아버지가 병원을 나와 초원장으로 돌아왔던 큰아버지가 할아버지만 보면 죽일 듯 달려들어 있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이혼을 요구하는 할머니의 끈질긴 요구에 결국 초원장의 소유권도 넘겨주면서 겨우 이혼을 당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있어 할머니는 ‘사랑하진 않지만 분리는 될 수 없다.’는 신념의 존재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