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로미오

10. 소설

by 이도원

『 일기를 쓰는 것만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삶을 지탱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만약 지금 누군가 나에게서 펜과 종이를 빼앗는다면 아마 머리를 벽에 찧어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쓰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처지를 잊어버릴 수가 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밥도 용변도 그 어느 것도 혼자 처리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조차 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가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다. 골목의 벽돌담에 바싹 붙어있는 이 방은 골목을 지나가는 그의 발자국 소리도 고양이 울음소리도 바람소리도 모두 들을 수 있다. 모든 감각 중 이 청각만이 살아남은 듯 내 귀는 어디론가로 떠나가는 그의 뜨거운 숨결조차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윽고 그의 발자국 소리가 골목 끝에서 끝나고 더 이상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심장 밑바닥에서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를 닦기고 씻기는 그의 팔 힘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것을 몇 해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눈 밑은 검어지고 자주 힘이 빠져버려 내 옷을 갈아입히는 것이나 씻기는 것을 중단한 채 벽에 힘없이 기대앉아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꼼짝없이 발가벗은 채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런 그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오직 죽는 일뿐이다. 어쩌면 그는 내가 자진해서 죽어주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일어설 수도 앉을 수도 없는 형편이지만 내 두 손은 멀쩡하다. 두 손으로 목을 조를 수도 있다. 아니면 이불의 가장자리를 뜯어내어 그것으로 목을 옭아맬 수도 있다.


여기서 글을 더 이상 쓰지 못하고 놓아버린다. 누워서 쓰는 글은 오래 이어지지 못한다. 양 쪽 팔이 모두 저릿하고 욱신거린다. 팔을 마사지하며 흔들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면서 피가 돌기를 기다린다. 그럼에도 나는 행운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를 곁에 붙잡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했더라면 필경 품위 없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신세나 한탄하며 세월을 낭비하였을 것이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건강한 육체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얻어진 달콤한 과육과도 같은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무력한 심장이 격하게 고동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희열은 가엾은 육체에 대한 넘치는 보상이다. 또다시 나는 공중에 매단 독서대에 얹혀 있는 일기장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는 오전 9시에 나갔다. 라디오에선 건조주의보가 내려졌음을 말해주었다. 어느 곳에서 산불이 일어났고 어느 누가 자살했고 어디서 교통사고가 일어났는지 기자는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여전히 경기가 좋지 않아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있고 지구온난화로 인해 앞으로 상당한 자연재앙이 일어날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갔는지, 누구를 만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기껏해야 그의 몸에서 나는 음식냄새와 술냄새를 맡으며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밀어놓고 간 김밥을 다 먹었다. 이제 누워서도 체하지 않고 제대로 잘 먹을 수 있다. 나의 장기는 오랫동안 누워있느라 무력해 질대로 졌건만 용케 주인을 괴롭히지 않고 잘 버텨주고 있다.

그는 내가 밥을 남기는 것을 싫어한다. 접시에 뭔가 남겨있으면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눈은 표독스럽게 변한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다 먹어치워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자리에 눕고부터는 먹는다는 것, 먹고 난 뒤 배설해야 하는 것에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가 용변을 처리해 주는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 그래서 나는 밥알 하나하나 세듯 천천히 먹는다. 빨대로 물을 마시고 요의를 느끼면 그가 채워준 기저귀에 오줌을 눈다. 서서 오줌을 누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 모를 것이다.

과일이 먹고 싶다. 그는 오랫동안 과일을 주지 않았다. 지난 늦가을 홍시가 전부였다. 하지만 과일은 사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가난해지면 입맛도 변하는 법인데 이 과일만큼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담배와 술이 간절하다. 그가 담배와 술을 주었더라면 더욱 견디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그에게 표현할 수 없다. 이제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병원비와 빚, 그리고 그의 소유인 이 집마저 대출로 잡혀있다.


나와 그는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가족들은 나를 불량식품처럼 더럽고 혐오스럽게 여길 뿐 보살필 뜻은 애당초 없었다. 그에게 짐짝처럼 맡긴 채 돈만을 가지고 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수치스러웠던지 이제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가난해지면 가장 먼저 방기 하는 것이 가족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결국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품위를 지킬 수가 없어서, 품위를 지킬 수 없도록 만드는 질병과 가난의 여러 가지 징후를 이겨낼 수가 없어서 여기서 그만 죽어버리자 했을 것이다.

나와 달리 그는 가난을 견디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불우한 유년시절은 가난을 이겨내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공공시설을 전전하며 양치와 세수를 하고 용변을 보는 법을 알고 있다. 조악한 음식과 차가운 잠자리를 잘 견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가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리라는 것을 짐작한다. 이제 돈을 줄 사람은 없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이리저리 한참을 살펴보다가 나갔다. 무언가 내다 팔만 한 물건이 있는가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팔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절박감이 나를 더욱 비굴하게 만든다.

나는 더더욱 그 남자를 기다리는 심정이 된다. 그는 돈을 구하러 나가고 나는 이렇게 그 남자에게 매달린다.


나는 이제 노동의 희열이나 고통은커녕 그를 안을 수도 없다. 에이즈라는 질병에 노출되자 이 도시는 나를 소외시켰다. 내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매일 주지 시켰다. 몸뚱이조차 쓸모없어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쥐새끼처럼 엿듣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는 것뿐이다. 그가 오기 전까지, 대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고 다시 내 방문을 열기 전까지 기록을 쉬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몇 분 전부터 계속 누군가가 대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기척이 났다. 남자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두 차례 부르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담배를 피우는 듯 내 방 창문으로 담배냄새가 들어왔다. 남자는 몇 대의 담배를 연이어 피우는 것 같았다. 나는 하마터면 담배를 좀 달라고 큰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대문이 닫히며 그와 그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이때가 가장 고통스럽다. 골목엔 한낮의 정적만 흐르는 듯 고요하다. 그 적요가 내 방 안으로 들어오는 듯 나는 서러움에 사무친다. 눈물이 흘러나온다. 분하고 서럽고 비참하다.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한다. 그만 접어야 한다. 이러다가는 미치고 말 것이다. 의식이 살아있을 때 이토록 허무감이라도 남아있을 때 여기서 그만 접어야 한다. 나는 내 목으로 천천히 손을 가져간다. 가느다란 내 목은 두 손바닥으로 감싸고도 남는다. 그리고 힘을 준다. 엄지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모두 골고루 힘을 준다. 조금씩 목이 답답해지며 얼굴이 뜨거워진다. 급기야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공포가 엄습해 온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전등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러자 스르르 손의 힘이 풀어진다. 분명 나의 무의식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하다. 몸은 의지를 간단하게 배반한 듯 이제 손가락은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살고 싶다. 굴욕감을 맛보든 무력감에 살든 죽음과는 맞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다시 공책을 꺼낸다. ‘살고 싶다.’ 나는 단 한 줄을 쓴다. 비굴하게 살 것이다. 구차한 운명을 연명하며 살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힘으로 말이다.


그는 몇 권의 책을 넣어주고는 이내 밖으로 나갔다. 모두 그 남자가 준 책이 분명하다. 그가 그 남자를 만나기 전에는 책을 사는 것이 어려웠다. 그는 이 책을 사기 위해 야간 대리운전이나 홀 서빙, 그리고 가끔은 몸을 팔았다. 나는 그가 그렇게 돈을 버는 것에 침묵했다. 그리고 여러 남자들에게 돈을 받는 것을 묵인하였다. 돈이 없다면 나는 살 수 없다. 낭만적인 감정의 유희를 벌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그는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대신해 줄지도 모르며 이미 충분히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성애를 숨기기 위해 한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완벽한 가정을 꾸렸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다른 상대를 찾아서 뜨겁게 사랑한다는 그 남자에게 나와 그는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그와 그 남자의 관계를 알고 있고 그 남자는 그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남자와 연애를 하고 온 날은 웃음이 많아졌다. 나는 그가 웃는 것이 싫었다. ‘나는 이런 지경인데 넌 웃을 수 있단 말이지’ 그가 웃을 때마다 침대 옆에 있는 장롱을 손바닥으로 두들겼고 물컵을 내던졌고 용변을 손에 묻혀 벽에 문질렀다. 그가 영문을 모른 채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가 되어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와 같은 처지가 아닌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갈수록 치졸해졌다. 누워서도 그를 괴롭히는 방법을 생각했다. 호락호락하게 죽지 않을 것을 끊임없이 암시하고 먹을 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여전히 내 귀는 온통 대문 앞에 쏠려있다. 남자가 대문 앞에 서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초인종이 고장 난 것은 한참 되었으니 아마도 이 남자는 오랫동안 초인종을 누르다가 결국은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게 된 것이리라. 처음엔 철거지역을 순회하며 협박하고 회유하는 사람들이거나 용역업체이거나 공무원인 줄 알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소심하지만 신중한 사람의 전형적인 톤을 가지고 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가 조금 쉬었다가 다시 두 번 불렀다가 조금 쉬었다가 다시 부르는 식이었다. 그렇게 두 번 정도 시도했다가는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돌아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하며 대문 앞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남자는 이제 대문을 손으로 두들긴다.

남자의 목소리엔 간절함과 진지함이 들어있다. 지금껏 그를 찾아온 다른 남자들의 목소리와는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했다. 이전의 남자들은 오랫동안 육체노동을 한 사람의 전형적인, 이를테면 그들이 지고 있는 등짐에 짓눌린 채 내지르는 힘겨운 고통의 소리였다. 문 밖의 남자는 결이 달랐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하고 물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가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나는 질투로 가슴이 벌렁거렸다.


나는 그가 그 남자와 만나는 것에서부터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그리고 모텔로 들어가는 것까지 상상한다. 나의 상상은 침대 위에서 시작해서 침대로 끝난다. 그가 따스한 방에 등을 대고 누워 그 선량한 목소리의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바로 눈앞에 그려진다. 더운물로 몸을 씻은 그의 몸 뒤로 그 남자가 올라가고 이윽고 그들의 침대가 들썩이고 그들의 환희에 찬 신음소리가 방 안을 진동할 것이다. 그의 단단한 몸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흘러나올 것이고 닫혀 있던 입술은 사랑스럽게 열렸을 것이다.

나는 그가 나를 버리지 않고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오길 기대했다.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만 쏠려있어서 공복의 괴로움도 용변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바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축축하였다. 등은 따갑고 쑤시며 엉덩이는 오줌과 똥으로 인해 이미 굳어버린 지 오래였다. 발 밑엔 내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기저귀가 산처럼 쌓여있다. 이미 나의 똥냄새에 절은 내 코는 더 이상 그것이 역겹지 않다.


다시 그의 방 쪽으로 집중한다. 그의 방에서 뭔가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의 방문이 열리고 그가 발을 끌며 내 방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들린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가 문을 연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이겨낸다. 만약 그를 본다면 화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들어와 용변을 처리하였다. 유곽에 들어오는 손님을 위해 능숙하게 가랑이를 벌리는 창녀처럼 나는 엉덩이를 들어주며 고분고분한 환자가 된다. 그는 방바닥에 있는 기저귀와 휴지뭉치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마치 그가 이렇게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괴롭히고 싶으면 얼마든지 괴롭혀. 어차피 넌 나를 괴롭히거나 질투하는 욕망밖에 없으니까.’


나는 그의 냉대에 도리 없이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그것이 지루해지면 자위에 몰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육체적 활동이 바로 자위인 것이다. 그와 그 남자의 몸을 대상으로 자위한다. 우람한 어깨와 가슴, 단단한 엉덩이를 떠올리며 내 손을 이끄는 것이다. 욕망에 못 이긴 그가 나에게 건너와서 내 몸 위로 올라오는 짜릿한 상상을 했지만 그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

기저귀 아래 나의 몸 중 가장 정직하고 유순한 그것을 손으로 만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주인의 다급하고 간절한 마음을 이내 알아차리고 반응한다. 나의 손놀림은 빨라지고 호흡도 따라 가빠져온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절정에 오르지 못한다. 마치 포수에 쫓기는 사슴처럼 위태로운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랜만에 고깃국을 끓여 와 나에게 숟가락으로 떠먹였다. 그의 몸에선 싸구려 비누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만 볼 수 있는 반응이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나와 사랑에 빠졌을 때와 똑같은 눈빛과 피부이다. 이제야말로 그 남자에게 그를 양도해야 하는 지경에 온 것인가. 그가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내겐 저주처럼 들렸다.

그는 과일과 빵, 그리고 술도 사 왔다. 나는 그 남자 덕분에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과일을 먹을 수 있다. 이미 그는 술에 취한 상태이다.

“자 자기도 마셔봐.”

그는 술병에 빨대를 꽂은 채 나에게 건넨다. 나는 그것을 마셨다. 술에 취한 그는 벽에 기대는 것도 힘든지 완전히 방바닥에 뻗어 길게 누워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남자와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싶을 뿐이다. 나는 그를 사이에 두고 그 남자와 내가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장면을 연이어 상상한다. 세 남자가 기이하게 엮어지는 것이다.


그가 남자와 나란히 산책하는 것을 상상한다. 무심한 시선으로 그들을 오래도록 지켜보는 나 자신도 상상한다. 그러다가 나는 그들을 근처 모텔로 이끈다. 나는 휠체어를 타고 도서관으로 들어가 책을 읽는다. 거동이 불편한 나로서는 선택할 수도 없었던 책들을 실컷 보고 탐낼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나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아름다운 남자, 건강한 몸, 그리고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가 있고 그가 사랑하는 그 남자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창가에 앉아 그와 그 남자가 들어간 모텔을 바라본다. 붉은 융단이 깔려있는 복도와 커튼이 드리워진 방, 정갈한 침대, 그리고 윤기 나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물과 그가 그 남자의 팔을 베고 단잠을 자고 있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우리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할 것이다. 놀랍도록 깊은 사랑이 이 불가능한 관계를 성사시킨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니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하고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가 한 행위엔 수 천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했다. 서로를 필요로 함으로써 우리는 추악하고 남루한 일상을 버텨냈다. 싱거운 교미나 변태적인 관음증이 빚어낸 막장의 종말이 아닌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은 서로 대상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자신을 투영할 그 무엇이 필요했고 그것은 바로 세 사람 모두에게 적용됐다. 그는 남자가, 나는 그가, 남자는 그가 필요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자살이든 극단적인 종말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중요할 뿐 세 사람의 관계는 불온하지 않다.


남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남자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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