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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원 Feb 10. 2024

드디어 나의 책리뷰가 실렸다

문무학 시조 시인의 책으로 노는 시니어 


문무학 선생님께서 책을 보내주셨다. 내 책에 대한 독후감이 실려있을 거란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달음에 읽으며 하루를 묘한 긴장과 흥분 속에 보냈다. 나는 치정주의자라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맥을 못 추는 경향이 있다. 언제 나는 이런 감정의 롤러코스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자학에서 벗어나 어제오늘 괜히 즐겁다. 책을 내니 이런 일도 생긴다. 저지르지 않으면 실패도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생은 저지르는 자의 몫이라는 말도. 이 자리를 빌려 문무학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   






찝찝한 예감   

     이도원 소설집, 『그녀들의 거짓말』, 푸른 사상, 2023.  





    

  소설가 이도원,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했고, 2020년 「세 사람의 침대」로 현진건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대구에 산다. 2022년 어느 가을날 밤 소리꾼 박경화가 주관한 문인수 시인 추모의 밤에서 처음 만났고, 그 후 2023년 대구문학상 행사에서 본 것이 그와의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그가 『그녀들의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집을 상재했다. 아마 첫 소설집인 것 같다.  

  자신을 소개하면서 “가난한 자, 소외된 자에게 편파적으로 기댄 소설을 쓰겠다고 호언장담한 당선 소감에 스스로 묶여 근 20년을 공터와 폐허와 빈집으로만 돌아다녔다.”, <작가의 말>에서는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변명하기 위해서이다.”라고 썼다. ‘어! 뭔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책이 왔을 때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희곡과 소설, 다섯 권 째로 『멜랑콜리아 ⅠⅡ』를 읽고 있어서, 내게 그다음 읽을 책이 되었다.

  여덟 편의 작품을 읽으면서 많이 ‘아팠다.’ 제목은 다르지만 가난과 소외라는 한 궤적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가난한 것이 지겹고 소외되는 것이 아파서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다. 작가는 지겹지도 않았는지 집요하게 가난과 소외를 파고들었다. 왜 이렇게 비루한 삶만 다루어야 하는지 묻고 싶을 정도다.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전개되는 이런 삶이라면 나는 하루도 더 살고 싶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밤 이 책을 읽으며 따뜻한 침대를 가진 것이 참으로 고맙게 여겨졌다. 작가의 노림수에 걸려든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그렇구나, 가난한 자, 소외된 자에게 지독하게 편파적인 소설, 그걸 쓰겠다고 마음먹은 작가의 작품이니까 싶었다. 그래도 지나치게 편파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소설가의 당선 소감은 정치인의 공약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철저히 지키지 않아도 그 누가 목숨 걸고 따질 사람도 없는데, 작가가 이 말을 20년 동안이나 팽개칠 수 없었다니 자기가 뱉은 말을 꼭 실행해야만 하는 편집증이 있구나 싶다. 

  나는 이 소설집을 읽고 ‘가난과 소외’라는 현실에서 작가가 작품마다 ‘책’을 들고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대놓고 「책 읽는 남자」라고 제목으로 단 것도 있지만, 「세 사람의 침대」는 아예 ‘책 읽는 여자’로 제목을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겠다. 「자개장롱이 있는 집」에 책은 없었지만 학원이 나오고, 「그녀들의 거짓말」에서 “내가 들여보낸 책은 잘 읽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책 밖에 없다. 네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면 말이다.”(48쪽)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만도 아닐 것 같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무책임한 자들을 양산할 뿐이야. 책은 비겁한 사람들의 도피처에 불과해,”(158쪽) , “책을 읽는다고 해서 배가 고프지 않은 건 아니에요.”(162쪽)라고 쓰기도 했지만, 작가는 책에다 삶을 기대고 소설을 기대고 있음을 숨기지 못했다. 시인 장정일의 시를 인용하고, 조르바와 「월든」 그리고 「무진기행」까지 소설에 끌어와서 써먹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책은 아니야,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 

  또 한 가지, 1인칭 시점의 소설이지만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하나 없다. 이름 지어주기가 싫었던가. 그럴 필요도 없긴 하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꽤 괜찮은 일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특정한 누구가 아니라 누구든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함묵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누구나 가난하지 않을 수 있고 또 누구나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다 가난해질 수 있고 또 누구나 다 소외될 수도 있다. 그 누가 아니고 나와 너 그리고 그, 

  한 가지 더 보탠다면 「그녀들의 거짓말」에서 “마음은 통하지 않아도 몸은 통하는 것이 남편이란 작자거든,”(144쪽), 「세 사람의 침대」에서 “상대가 원하는 것은 절대 들어주지 않는 것이 부부의 속성인 것처럼,”(157쪽)에서 웃고 말았다.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요 며칠 욘 포세 작품의 ‘멜랑콜리아’가 내게 건너왔고, 이도원의 소설이 또 나를 괴롭히기도 하는데, 이 구절들이 ‘그렇구나.’라는 긍정의 바람으로 불어왔다.   

  타인의 불행을 보며 다행으로 여기는 내 삶, 그것을 누리라고 한 것인가? 해설자의 견해를 참작하지 않는 나는 이 소설집이 그런 의미로 다가섰으면 좋겠다. 거창한 의미를 가지지 않아야 순수한 것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심각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지금 내가 아니어서 좋았다. 아니 지금 우리 식구가 아니어서 좋았다. 나는 그런 속물이다. 그렇지만 나의 미래에 그 지독한 가난과 소외가 있을 수 있다는 찝찝한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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