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의 모닝 페이지
마음이 어지러울 때가 있다. 그저 호수에 파문이 이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뒤돌아 보니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치는 것 같은 혼란스러움. 내 마음 어디 하나 기댈 데가 없어서 파도가 밀치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 같은 무력감. 폭풍우가 빨리 잠잠해지길 바라면서도 언제 끝날지 몰라 막막하기만 한 절망감.
이 감정을 정리해두지 않으면 또 언제 불현듯 튀어나올지 몰랐다. 어느 날은 조금 우울해지거나 의기소침해지는 것에서 그쳤지만 또 어떤 날은 무섭게 돌변하기도 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무렵, 파도에 몸을 피하려던 사람은 어느새 파도가 되어 있었다.
올해는 정말 마음 수련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하다가 '모닝 페이지'도 슬쩍 끼워 넣었다. 다들 그리 좋다고 극찬을 하는데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 '모닝 페이지' 쓰기
매일 아침 노트를 펼쳐놓고 그 자리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세 페이지씩 쓴다. 내용은 어떤 것이든 좋다. 친구와 나눈 이야기, 빨랫감, 일 걱정... 쓸 말이 없거든 "쓸 말이 하나도 없네..."라고 쓴다. 무조건 세 쪽을 채운다. 이렇게 아침마다 글을 긁적이는 것이 도대체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싶겠지만, 몇 주, 몇 달에 걸쳐 모닝 페이지를 써나가다 보면 어느새 내면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창조적 지혜의 샘이 넘쳐흐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는 독서 모임에 나갈 때마다 추천을 받았던 책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모닝 페이지'의 효과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 한동안 쉬고 있었지만 다시 시작해 볼 것이라고, 꼭 너도 해보라고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책이기에. 처음에는 그저 흔해빠진 자기계발 서적 중 하나 정도라고 생각했다. 부제로 달려 있는 '창조적 워크숍'이라는 말도 예술가들에게나 필요한 내용이라고 여겨졌다. 창조적 회복은 무슨, 그냥 아침 일기를 적는 거겠지. 시작은 냉소적인 마음이었다.
모닝 페이지 1일. 삶이 바뀐다고 하니 일단 써보긴 하지만 그 효과는 크게 믿지 않았다. 뭘 해도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싶은 마음 정도였다. 힘들었던 만큼 글은 막힘없이 터져 나왔다. 내가 당면한 문제들과 나의 감정들, 그래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를 적었지만 구체적인 해결 방안은 나오지 않은 채 막막한 마음이었다. 마지막 3페이지를 적을 때는 팔이 아파왔다. 3페이지를 45분 동안 적어야 한다는데 1시간이 되고 있었다. 다음엔 줄 간격이 넓은 것으로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2일~7일은 1일 차에 고민했던 내용의 반복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3페이지를 쓸 때쯤이면 머릿속의 잔여물들이 끄집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왜 아직도 그 문제에 연연하는지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했다.
8일부터는 쓸 주제가 떨어졌다. 한탄과 푸념도 여러 번 반복하면 동이 나는 걸 알았다. 유튜브나 블로그를 기웃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꾸준히 모닝 페이지를 쓰는지 염탐해 보았지만 다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분량을 채우기 위해 일부러 길게 글을 늘려보았지만 두 페이지도 채우지 못하고 마무리했다. 1일 차의 고민은 조금 흐려져 있었다. 혼자 계속 쓰는 건 막막할 것 같아 9일부터는 모닝 페이지 챌린지에 등록했다.
13일, 모닝 페이지의 효능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2주가량 썼는데 달라지는 건 없었고 쓸 말도 없는데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1일 차의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제 아무런 문제도 없이 평온하다고 생각했다.
14일, 1일 차의 문제가 갑자기 다시 터졌다.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적어 내리며 진단을 내렸고, 호되게 다그치고 꾸짖었다. 감정의 밑바닥을 확인하자 눈물이 나왔다. 모닝 페이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후기들을 종종 봤는데 그 당사자가 내가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감정을 비워내자 그다음 날부터는 놀랍도록 마음이 평온해져 있었다. 쓰고 싶은 말도 떠오르지 않아 겨우 한 페이지를 작성하거나 5줄로 마무리하는 날도 많았다. 이 즈음 긍정적인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불편한 일과 마주하더라도 예전처럼 화가 나지 않았다.
24일, 의무감에 끄적이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때까지도 모닝 페이지를 계속 쓸 것인지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29일, 손글씨 말고 컴퓨터 워드로 작성해 보았다. 결과는 실패. 손글씨로 터져 나오던 잡념들이 키보드와 마주하는 순간 정제된 글로 적히고 있었다. 다시 손글씨로 쓰기로 했다.
30일, 1일 차의 그 문제에 대해 다시 고민했다. 이번에는 이전과 조금은 다른 태도로 접근했다.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고민했던 지점에 대해 '어쩌라고!'의 태도까지 가질 수 있었다. 아이디어는 계속 샘솟아서 앞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이상과 가치에 대해 떠오르게 되었다. 정확히 30일 만에 왜 다들 모닝 페이지를 극찬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올해의 다짐처럼 포스트잇에 적어 모니터 앞에 붙여두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일이다.
- 팀 페리스
모닝 페이지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1️⃣ 일어나자마자 의식의 저항이 없는 상태로 써야 한다.
2️⃣ 쓸 말이 없더라도 무조건 3페이지를 채운다.
3️⃣ 긍정적인 내용이든 부정적인 내용이든 검열하지 않고 적는다.
4️⃣ 모닝 페이지 내용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
5️⃣ 8주 동안은 나 자신도 다시 들춰보지 않는다. 8주가 지난 다음 '새롭게 깨달은 것', '행동이 필요한 것'에 색깔로 표시한다.
30일 동안 규칙을 다 지키지 않은 날이 많았다. 특히 새벽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1️⃣일어나자마자' 쓴다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저녁에 쓰면 그날 하루의 반성에서만 그칠 뿐,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해서 업무 시작 전에 쓰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어려움을 느끼는 지점이 '2️⃣무조건 3페이지'일 것이다. 하지만 2페이지까지는 어제와 오늘,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 것뿐,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는다. 진짜는 3페이지부터라는 말을 경험하고서야 깨달았다.
막히는 게 있으면 모닝 페이지에 물어봐요. 모닝 페이지가 답해줄 거예요.
모닝 페이지를 쓰고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실제로 바뀐 것은 많지 않다. 나는 지금도 흔들리고 앞으로도 흔들릴 것이다. 마음이 언제나 맑은 하늘일 수는 없다. 하지만 먹구름이 조금 끼어 있다고 해서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전에는 나의 불안감을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거나 그러지도 못할 때면 혼자 속앓이를 하며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감정을 쏟아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잔여물이 다시 괴물처럼 튀어나와 나를 삼켜버릴 수 있다. 밑바닥을 확인하고 토해내면 그것만으로도 정화가 된다. 그 상대가 모닝 페이지라면 안심할 수 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를 검열하거나 평가하지 않는, 든든한 대나무숲이다.
다시 단단하고 꼿꼿하게 설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내일도 모닝 페이지를 쓴다. 30일간의 모닝 페이지 여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이 흔들린다면, 중심이 필요하다면 당신도 일단 시작해 보시라. 후회는 시작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