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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이한 Aug 16. 2024

너는 외계인이 아니야

상담 일지④ 고통의 원인을 알아차리다

세 번째 집단 상담을 마치고 내 마음은 조금씩 안정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것은 많았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온 메일을 확인하고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상사의 폭언과 부당한 업무 지시로 마음을 다쳐 집단 상담과 개인 상담까지 신청하게 된 그 사건의 내용이 알고 보니 훨씬 더 심각한 내막을 담고 있었고, 관련자에게 이 내용을 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회사에서는 업무 처리 과정에서 참조인으로 나에게 메일을 보낸 것이었지만, 사건의 내막을 한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된 나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렇게까지 꼴통인 회사일 줄은 몰랐는데. 메일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며 내가 든 감정은 분노를 넘어선 어이없음이었다.


충격 요법의 효과는 상당히 좋았다. 지금까지는 불안이라는 감정에 휘둘려 울기만 했지만 이제는 이성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어 오히려 다행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은 이 사건 때문에 본래의 나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것이 일시적인지 아니면 완벽히 회복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네 번째 집단 상담의 주제는 '요즘의 관심사'였다. 이곳에서라면 내가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겨서일까. 들뜬 마음에 평소에 털어놓지 않았던, 내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유형의 사람과 그런 사람을 대할 때 왜 화가 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의 반응이 석연치 않았다. 내 말을 의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한 그런 묘한 반응. 갑자기 나의 내밀한 감정을 너무 온전히 드러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지고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자유 시간에 사람들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을 때에도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가 두려워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여러 긍정적인 주제도 많았는데 왜 하필 '내가 싫어하는 유형'이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꺼냈을까. 사람들이 내 앞에서는 친절하게 웃고 있지만 사실은 속으로 '저 사람은 엄청 꼬인 사람이구나.'라고 판단하는 게 아닐까. 집에 돌아오는 내내 그날 배웠던 각종 명상 기법을 동원해 마음을 진정시켜 보았지만 한 번 꺼내진 공포심은 다시 들어갈 줄을 몰랐다. 어찌나 명치 쪽을 쓸어내렸는지 며칠 동안 그 자리가 땡땡하게 부어있을 정도였다.  


며칠 후 개인 상담에서 나는 이 경험에 대해 털어놓았다. 상담사가 그러한 생각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안심을 시켜주는데도 '사람들이 앞에서는 친절하게 대해도 다들 속으로 딴생각을 하잖아요'라는 반발심이 들었다. 내 공포심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어느새 50분이 지나 있었다. 오늘 이야기에 딱히 소득이 없는 것 같아 조급증이 일었다.


"제가 너무 쓸데없는 말만 했을까요?"

"이한 씨가 한 말 중에 쓸데없는 말은 하나도 없어요. 이한 씨는 지금 계속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이 이한 씨에게 직접적으로 그런 평가를 했었나요?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이 말하지도 않았던 것을 짐작해서 생각하지 말아요."


그 말 또한 나는 비난으로 들렸다.




최근 연극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직장인 극단에서 잠깐 활동해 본 적은 있었지만 수업의 형태로 배워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늘 수업은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법'이었다.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 같은 여러 감정을 관객들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먼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나른한 자세를 만드는 것부터 했다. 어디에 앉아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상상을 하며 몸을 만들어보는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하나도 편해 보이지 않았다.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어 바라보고 있는 내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왜 그렇게 경직되어 있어요?"


요즘에 마음이 많이 힘들어서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 민망한 웃음을 짓는데 이어지는 선생님의 말이 놀라웠다.  


"다른 사람들 이끄는 거 좋아하죠? 성격이 불 같아서 화도 자주 낼 거고. 여러 가지 관심 분야는 많은데 시작하려고 하면 생각이 많아지고. 많이 답답하겠네."


이제 겨우 두 번 만났는데 내 성격을 저렇게 다다다다 읊는 사람은 처음 봐서 무당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 여러 말 중에서도 마지막 '답답하겠다'는 그 말이 내 심장을 찌르고 갔다. 지금까지 받았던 어떤 심리 상담보다도 그 말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내 아픔은 마음이 답답한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계란에 바위 치기여도 계란 자국이라도 남겨봐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내가 불편하다는 걸 몰라요."


이 수업에서 얻은 또 하나의 말. 나는 지금까지 내 성격이 예민하고 까다로워서 걸핏하면 분노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 참는데 너는 왜 그러냐는 비난을 들은 적도 많았다. 사회생활을 하며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 대다수가 불필요한 말을 삼가고 다른 사람에게 맞춰주는 성향이었기에 나는 아직도 어리고 미숙하다는 자책도 했다. 이런 성격을 고치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스리고자 명상 수업까지 신청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50대 언니가 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나와 똑같은 사람도 잘 살아가고 있구나. 그저 내가 속한 환경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뿐이었구나. 나는 외계인이 아니었구나. 나와 같은 사람이 지구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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