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그건 아니지. 이렇게 해야지.
아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한때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뱉던 말이다. 왜 이런 식으로 의사소통 해왔을까? 답답하기도 했고,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며, 무의식적으로 내 이성과 논리를 치켜세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터다.
그러나 위태로운 상대방은 타박을 듣기 위해 여린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다. 그 응어리를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기에 일말의 기대로 마음속 상자를 연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껏 힘을 실은 채 그 상자 속을 거칠게 휘저었다. '너를 아껴서 하는 말' 뒤에 숨어서 으스댔고, 결국 어지럽혀진 상대방은 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상자를 단단히 밀봉했다.
조금만 힘을 빼고 말했더라면. 그래서 상자 속 감정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바라봤다면, 그 속에 있던 지혜가 스스로 빛날 수 있지 않았을까? 힘을 싣고 대화하면 필연적으로 가르치게 된다. 비판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거친 위협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힘을 빼고 상대의 말을 진정으로 듣기 시작한다면, 상대방은 스스로 고개를 들어 매무새를 정리하고 일어날 준비를 한다.
이 과정이 청자에게는 고역일 수 있다. '곧은 이성'이 상대방의 '흔들리는 감정'을 계속해서 바로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답을 원할 때조차도 그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끔 기다려줘야 한다. 무언가를 쉽게 제시하려 들지 말자. 또한, 상대방이 했던 말을 반복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대화가 빙글빙글 맴도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는 일종의 착시다. 실제로는 치료적 소통이 나선형으로 돌며 중앙에 위치한 통찰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경청의 위대함은 알고 있었지만 실천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 때문에 최근에도 본의 아니게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니 되새긴다. 적어도 상대방이 고통 속에 허덕일 때만큼은 '빨리', ‘조언’이라는 단어는 멀리하고, 충분히 스스로를 느끼고 표현할 수 있게 '편안한 환경', '따뜻한 분위기'가 되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