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유난히 덥다. 온도도 온도지만 더운 기간도 예년에 비해 더 길어졌다. 매일 온열 질환자가 늘어나서 뉴스 틀기도 무서울 정도다. 오늘은 또 몇 명이 쓰러졌을까? 이런 더위에도 땡볕아래에서 일을 시키다니! 나쁘다. 이렇게 글이나 쓰고 있는 나는 에어컨에게 쉬지 말고 일하라고 채찍질을 하며 전기료 걱정만 하면 되지만, 밖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어찌 이 여름을 견뎌내고 있는지 걱정이다. 올 여름 기온이 아프리카보다 높다고 하니 이건 준비되지 않은 재난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더운 날 인형 탈 아르바이트생이 탈진해 쓰러지도록 아무런 조치도 안 취한 기업이 있다는 기사도 봤다. 그 기사를 보고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회사는 확 망해야 한다고. 대체 기업은 사람을 뭘로 생각하는 걸까. 사람 귀한 줄 아는 기업은 지금껏 본 적이 없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땀 흘려서 찝찝한 기분도 별로고, 햇볕 때문에 다들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더위에 조금만 노출되어도 두통이 찾아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놀이든 노동이든 여름에는 무엇이든 피하고 싶다. 누가 나에게 부자가 되고 싶은 이유를 단 하나만 말하라면, 여름에 집에만 있기 위해서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지금 할 일 없는 백수여서 온 종일 집구석에 처박혀서 지내는 중이다. 가끔 해질녘 해변에서의 맥주 한 캔이 그립기도 하지만, 올 여름은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집에만 있고 싶다. 사실 마리와 아내를 관찰하며 언제 갑자기 병원으로 달려갈 일이 생길지 몰라서 술은 입에도 안 대고 항시 대기 중이다.
공포스러운 소식이 또 들린다. 앞으로는 더운 날이 계속 길어져서 여름이 5개월이 될 수도 있단다. 제기랄. 정말로 나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일 년 중 반을 히끼꼬모리처럼 집에서만 지내려면 그 방법 밖에 없다.
고백할 게 있는데, 나 사실 제주에서 사는 7년 동안 물놀이를 한 번도 안 했다. 호기심에 동네 해변에 한 번 뛰어든 적이 있는데 재미가 없어서 바로 나왔다. 수영은, 음, 나에게 수영은 물속에서의 이동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땅에선 걷고, 물에선 수영을 해야 앞으로 갈 수 있다. 도보와 수영은 어떤 목적지로 가는 방식이지 재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라는 인간, 대체 물놀이를 무슨 재미로 하는지 모른다. 하긴 스키를 왜 타는지도 모르고, 서핑보드를 왜 타는지 모르고, 힘들게 조기축구와 야구 동호회 활동 같은 건 왜 하는 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공감능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남들 다 좋아하는 놀이의 재미를 모르니 나란 인간 이렇게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일 수가 없다.
아니 사실은 부러운 거다. 얼마나 재미있으면 그 힘든 걸 이겨내느냔 말이다. 축구가 얼마나 재미있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참아내며 공을 쫓아 운동장을 뛰어다니느냔 말이다. 야구는 또 얼마나 재미있기에 타석에 한번 서기 위해 글로버를 끼고 자기에게 공이 오기를 기다리며 땡볕에 서있느냔 말이다. 뭘 하든 웬만하면 힘이 들어서 못 하는 나로서는 그런 스포츠와 놀이를 활발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부러운 것이다. 타고난 저질 체력 탓이겠거니 생각한다. 은둔하는 성향과 체력이 공존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라고 위로하며, 은둔에 특화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순응하는 삶이리라.
여름은 오로지 수박의 힘으로 버틴다. 수박이 없다면 이 여름 어떻게 버틸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수박이 한국에서도 재배하는 과일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망고처럼 네 개 만 원이면 큰일 날 뻔 했다. 그 비싼 게 먹지도 못하는 씨는 또 얼마나 큰지! 수박이 망고처럼 비싼데 가운데 씨 빼면 먹을 거 얼마 없는 과일이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애플망고처럼 조그만 거 한 개에 만원이라면, 아! 상상도 하기 싫다.
마트에서 수박을 한 통 사면 포크로 집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용기에 나누어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고 언제든 꺼내서 먹는다. 며칠 전 잡은 들소 한 마리로 당분간 행복이 유지될 원시인처럼, 샤워를 하면서 늘 이런 생각을 한다. 빨리 나가서 수박 먹어야지. 참 행복한 생각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냉장고에 있는 수박 생각이 난다. 빨리 쓰고 수박 먹어야지.
이렇듯 순전히 수박 때문에 여름을 애타게 기다리기도 하니, 여름이 싫다가도 이 여름이 아니면 수박을 언제 먹나 싶어서 또 여름을 좋아하게도 된다.
어머니는 고구마를 좋아하신다.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식사를 하시자마자 찐 고구마를 또 드셨다. 옆에서 아버지가 핀잔을 주면, “밥 배, 고구마 배 따로 있는갑소.” 라고 하시며 찐 고구마를 퍽 베어 드셨다. 그걸 지켜보는 어린 나도 목이 메어왔고 그런 어머니의 식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수박을 좋아하는 만큼 어머니가 고구마를 좋아하시는 거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 저도 밥 배, 수박 배 따로 있는 갑소. 배불러도 위에 수박 들어갈 자리 정도는 얼마든지 있다.
분명 고구마는 어머니 인생의 낙이다. 내가 수박 없는 인생을 상상할 수 없듯, 어머니 또한 고구마 없는 인생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어머니는 겨울이 싫다가도 마음 한편으로는 저 너머 밭에 심어놓은 고구마를 수확할 그 계절을 기다리고 계시지 않을까. 고구마를 드시는 어머니와 마주 앉아서 수박을 먹는 상상을 해본다. 그 자리에 행복과 사랑의 기운이 넘쳐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여름이 5개월이어도 괜찮겠다. 우와! 수박을 다섯 달 동안이나 먹을 수 있는 거다. 또 다른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한편, 뭔가를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생각만 해도 행복감이 느껴지는 게 수박뿐이라면 그건 참으로 불행하겠다. 나에겐 수박과도 같은 존재가 무수히 많다. 볼 때마다 간식 달라고 울어대는 내 고양이 마리가, 매일 아침 새집 지은 머리로 가서 앉는 거실의 안락의자가, 너무 재미있어서 손에서 놓기 힘든 책 한 권이, 편안하고 다정해서 또 가고 싶은 동네의 카페가 나에겐 수박 같은 존재다. 없어서는 안 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더 있을까. 수박 같은 존재로부터 힘을 얻는 것 말이다. 행복은 지속이 아니라 빈도수에 좌우된단다. 수박 같은 존재가 많을수록 더 자주 행복한 것이 당연하다. 방금 똥 싸서 기분 좋은 마리를 쫓아다니며 같이 노는 것도 행복하고, 내가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행복하고,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것도 행복하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나에게 무엇보다 거대한 행복은 곧 여름이 다섯 달이나 될 거라는 소식이 아닐까.
인생이라는 큰 강에는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이 떠 있다. 그 중에는 언젠가는 겪어야 할 큰 고통과 슬픔을 실은 배도 있고, 인간으로서 쌓아야 할 지성을 실은 배도 있다. 그리고 수박을 실은 배도 있다. 수박을 실은 배가 아마도 수십 척 정도면 인생이 좀 살만할 것 같다. 많다고 좋은 건 아니다. 많으면 수박 귀한 줄 모르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달달한 수박을 포크로 콕 집어서 입에 넣으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음! 인생은 수박을 발견하는 여정인 것만 같아.”
옆에 있던 아내가 피식하고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인생은 복숭아를 찾는 것이지.”
그리고 포크로 자기 앞의 복숭아를 콕 집어서 입에 넣는다.
암, 수박이든 복숭아든 뭐든 찾아내는 게 인생이지.
앞에서는 인생은 새로운 일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라고 주어진 것이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수박을 찾으란다. 아무튼 그렇다. 새로운 일이든, 수박이든 인생은 뭔가를 계속 찾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도 좋고, 새로운 도전도 좋고, 다 좋은데, 부디! 수박도 많이 찾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