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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의 공돌이 Sep 23. 2019

제주가 좋은 이유

제주에 살면서 육지에서의 삶을 가끔 상상한다. 특히나 하던 일을 그만두고 백수가 된 후로는 더 자주 하게 된다. 앞으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하다보면 우리가 꼭 제주에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고, 장소를 제주로 한정하지 않으니 시선은 육지의 다른 지방으로도 향한다.


제주에 사는 것이 가끔 불만족스러울 때가 있다. 비행기 표를 구하기 어려운 성수기 때는 육지와의 고립감을 느낀다. 하루하루 노쇠해 가는 양가 부모님이나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꼭 성수기를 피하기를 매년 여름마다 기도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에는 비행기 타는 것도 무서워서 또 비슷한 맥락의 고립감을 느낀다. 내장산과 주왕산에 가고 싶은 계절이 왔을 때도 차를 몰고 쉽게 갈 수 있는 육지에서의 삶을 그리워한다.


아마도 육지의 지방에 살고 있다면, 제주에 사는 지금보다 훨씬 여행을 많이 했을 것 같다. 계절마다 꽃놀이, 물놀이, 단풍 구경, 눈꽃 구경을 다니느라 전국을 누볐을 것 같다. 바쁜 도시에서의 일상에서 벗어나 제주에서의 삶이 주는 여유의 뒷면에 자리한 육지와의 고립감은 일종의 풍요 속의 빈곤인 것만 같다.


직장인일 때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잠시나마 답답하게 막혀 있는 숨통을 여는 것이 여행이었고, 그 힘으로 직장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여행은 삶의 질을 드라마틱하게 향상 시키는 것이었고, 단순한 여가활동이 아닌 간절하고도 절박한 어떤 것이었다.


제주에 살고부터는 여행을 통 못한다. 그것이 때론 불만족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사는 것 자체가 여행 같아서 여행이 그리 간절하고 절박하지 않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한다. 사랑하는 고양이 마리와 살고부터는 긴 여행을 포기한 측면도 있다. 아마도 10년 후쯤부터는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에, 그동안 관절 관리나 잘 하고 있자고 다짐하며 현재에 만족하려고 한다.


전체적으로 따져보면 전보다는 제주에 사는 지금이 훨씬 만족스럽다. 직장인일 때 매일 마주하던 무례와 몰상식의 빈도가 10% 아니 0.1% 이하로 줄었고, 말과 생각과 생활양식이 통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80%쯤 늘었다.

제주에 와서 민박집을 열고 지인과 친구들에게 연락했을 때, 제주에 가면 재워달라고 한 사람들은 모두 휴대폰의 주소록에서 삭제했다. 제주에 가면 가이드처럼 여행을 시켜주기를 바라는 뉘앙스를 비친 사람들도 모두 주소록에서 지웠다. 인생에서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고 도움도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드니 끊어내는 관계가 늘어난다.


우리가 제주에서 시작한 일을 응원하는 친구라면 제주에 올 때 나에게 연락하지 않고 우리가 운영하는 민박집의 웹사이트를 검색해서 들어가 예약을 하거나 인근의 다른 숙소를 예약했을 것이다. 그런 후 우리의 일상을 침범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자고 연락했을 것이다. 출간을 했을 때도 친구라면 책을 보내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서점에 직접 가서 내 책을 샀을 것이다. 대체로 끊어낼 관계는 늘어나고 새로운 관계는 잘 생기지 않는 것이 중년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그래서 제주에서 만난 사람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친분의 정도가 다르고 만남의 빈도도 다르지만, 정서가 비슷하고 낭만적인 상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모든 것을 떠나서 제주가 좋은 이유가 그것이다.


낭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인생에 별 도움 안 되더라도 낭만적인 생각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아내는 만 평 정도의 로즈마리 밭을 갖는 게 꿈이라고 했다. 아니! 이렇게 낭만적일 수가! 꼭 만 평이 아니라도 단 100평이라도 내 소유의 밭에 로즈마리를 심고 가꾸는 일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멋있고 낭만적인 일 같다. 저녁으로 스테이크를 구울 때 주방에 난 창문을 열고 손을 뻗어 로즈마리 잎을 톡 따다가 올리브 오일에 넣는 상상, 로즈마리 꽃을 꺾어 린넨 천에 감싸 다발을 만들어 현관에 걸어놓는 상상,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밭에 들어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아내의 꿈에 나도 슬쩍 끼고 싶다.


제주의 친구들과 모였을 때 만 평의 로즈마리 밭에 대해서 말 한 적이 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말을 했다면 아마 모두가 어이없어 했을 테지만, 친구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비슷한 꿈을 갖고 있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올리브 농장을 갖고 싶다고 했다. 로즈마리 밭이든 올리브 농장이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거기서 작은 연주회를 열면 좋겠다고 호들갑을 떨던 그날 밤 우리들의 대화다. 엄청 넓은 대지의 로즈마리나 올리브 농장주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할 때, 땅값과 수익에 대한 논의가 아닌, 작은 연주회를 말하는 친구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모른다. 낭만적인 상상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 이 섬 제주에 사는 것이 좋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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