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뭐해서 먹고 살지 고민 하다보면 결국 답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식산업으로 뛰어들 것도 아니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주변머리도 없어 보이고, 그렇다고 나 같은 사람을 보고 몇 십억쯤 투자하겠다는 귀인을 만날 일도 없다.
나의 경쟁력은 6년 동안 운영했던 숙박업 경력이다. 소규모 시골 민박집이었고, 초기에는 초보 장사꾼답게 어설프고 민망한 일도 많았다. 불필요한 상처도 받고 분노에 불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크던 작던 숙박업 운영의 절차와 수고로움의 정도를 잘 안다. 또한 작은 일에 상처 받고 분노하지 않는 장사꾼으로서의 내공까지 쌓였다. 다만 그때는 전력을 다해서 민박집을 운영하지 못 했을 뿐이다.
폐업 후,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왠지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작가로 살아가는 것을 놓아버릴 수 없어서 마치 온힘을 다해 본업을 거부하는 태도였달까. 민박집을 운영하는 동안 아주 열정적으로 일하지 않았고, 그것이 나의 본업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해 온 것 같다. 장사꾼보다는 작가가 훨씬 나은 삶이고, 글을 쓰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 온 것 같다.
요즘은 어쩌면 숙박업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나의 태도였지 그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달까. 참! 일찍도 알았다 일찍도 알았어! 내가 작가든 아니든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글쓰기는 나에게 가장 강렬한 지적행위일 뿐이다. 오랫동안 품었던 작가라는 꿈을 향한 간절함이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이어져온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은 글쓰기는 작가가 아니어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거기다 작품을 발표하는 데에는 작가라는 정체성도, 높은 기술력도 필요 없는 시대다.
나는 00이 되어야 한다, 라는 건 불필요하게 거창한 목표인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작가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원하는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무엇이 되어 살아가는가가 아닌 어떻게 사는가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인생에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나는 인생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진 책이 있었다. 몇 해 전, 이토록 허탈하게 우아할 수 있는지 의아한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스토너>가 대체 너는 인생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라고 나에게 질문했다.
내가 사랑하는 소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에서 마지막 눈을 감기 직전에 스토너는 자신에게 질문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이 한마디의 질문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되었다.
청년 스토너는 쇠퇴해가는 부모님의 농장을 살리기 위해 미주리대학 농과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뒤흔든 건 훗날 유용할 거라고 생각한 토양학 강의가 아니라 영문학 개론이었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골 청년에게 폭풍이 몰아친 것이다. 하지만 청년은 갈등하지 않는다. 대학 등록을 권유 받았을 때처럼, 청년에게선 농업이 아닌 문학이라는 자신의 선택에 어떠한 고뇌도 없다. 그렇다고 문학적 성취에 대한 뜨거운 열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찾아온 삶을 의무처럼 살아내는 것이 이 청년이 인생을 대하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내가 소설 <스토너>에 감동한 이유는 일관되게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는 그에게서 단 한 점의 나약함이나 비열함이 보이지 않아서다. 교수 사회 내에서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결혼 생활이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식으로 자신을 위장하지 않는다. 하물며 딸의 불행 앞에서는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 라는 허무한 질문만을 남기고 스토너는 눈을 감으며 소설은 끝난다.
내가 이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한 사람의 실패와 성공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취도 없고, 찬사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완성한 한 사람의 삶이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닌 그 사람에 의해서 완성한 그 사람의 삶 말이다.
무언가에 맞서지도, 어떤 희생을 치르지도, 그렇다고 거대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지도 못한 한 사람의 일대기를 읽고 난 후, 나도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되더라.
“나는 인생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언젠가부터 이것이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관통하는 질문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우아한 삶이란 이런 것이다. 성공과 실패의 경계가 무너져도 불안하지 않는 삶, 성취를 위해 헌신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운 삶, 실패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삶.
우리들 대부분은 실패한다. 대부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한 대부분 원하는 직업과 직장을 갖지 못한다. 희망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 있는 직장을 골라 들어가서는 대부분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한다. 수많은 자영업자 중 대부분은 비싼 임대료에 시달리고, 결국 언젠가는 폐업을 한다.
어쩌면 삶은 실패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세상은 제각각으로 비슷한 실패들로 가득하단 말인가.
나 역시 그 동안 작가로서 자리를 잡지 못했고, 앞으로 계속 작가로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작가로 살아가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그만두어도 딱히 실패한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뭔가를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아는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우아한 소설 속 우아한 주인공의 삶에 나를 대입하고 싶지는 않지만, 갈등과 고뇌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내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혹은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곱씹는다.
나는 인생에 무엇을 기대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