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결혼준비에 한창이던 4월, 청첩장을 전달하기 위해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던 날의 연속이었다. 그날도 친구들과 점심 약속이 있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감정이 밀려왔다. 그녀의 나이 94세였다. 건강하고 또렷했던 할머니는 그렇게 영영 돌아오지 않을 길을 걸어갔다. 고운 옥색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가 당연히 내 결혼식에도 오실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결혼 2주 전의 일이었다. 평상시에는 항상 바쁘니까 오지 말라고 했던 할머니가 결혼식 한 달 전부터 계속해서 언제 한 번 내려올 수 없냐는 말을 하셨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후회가 됐다. 할머니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던 걸까?
할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알뜰한 사람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녀는 말라비틀어진 식재료도 그냥 버리지 않았다. 더워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추워도 난방을 틀지 않았다. 더우면 맨바닥에 눕고 추우면 전기장판에 지지면 되었다. 생선 구이를 먹으면 살을 발라먹고 남은 뼈다귀도 그냥 버리지 않았다. 잘못 자른 못생긴 테이프 조각도 버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사용하는 소독약과 모기약은 전부다 최소 10년이 넘었다. 무엇이든 아껴 쓰는 그녀였다. 최후의 최후의 최후까지도 무언가를 버리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할머니의 욕실에 있는 분홍색 플라스틱 바가지는 어렸을 때부터 그대로였다. 아마 나보다도 더 오랜 시간 세월을 견뎌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돌아왔다. 할머니는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까지도 자식들의 밥값을 신경 썼고 돈을 아껴 손주들 차비와 세뱃돈을 챙겨주셨다. 매번 그랬다.
그녀의 자식 사랑은 유별났다. 자나 깨나 자식 걱정을 하곤 했고 그리곤 항상 자식이 최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식과 손주들이 할머니 집에 방문할 때면 그녀의 집은 늘 깨끗했다. 할머니는 혼자 살기엔 넓은 방 세 개짜리 집을 부지런히 닦고 청소했기 때문에 어느 방이라고 먼지가 앉아 있지 않았다. 94세가 되도록 그녀는 한결같이 그랬고 그것 또한 할머니가 사랑을 표현한 방식 중 하나였다. 그녀는 자식들이 집에 온다고 하면 어디에 있든, 어떤 중요한 일이 있든 30분 이내로 집에 돌아왔다. 자식들이 오기 전부터 이웃에게 전화해 주차장에 자리를 맡고 기다렸다. 자식들이 집에 오면 언제 어느 때고 그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밥을 차려주는 일이었다. 그녀의 음식에는 자식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오래되어 끈적끈적해진 붉은색 밥상에는 언제나처럼 정성이 가득한 밥과 반찬과 국이 차려졌다. 언제나 그랬다.
할머니는 사랑 부자였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꽉 안아주었고 헤어질 때도 온 힘을 다해 안아주었다. 그럴 때면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절대로 90세가 넘은 노인의 힘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어떨 때는 얼굴이 축축해지도록 진하게 입맞춤을 해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런 할머니의 사랑 표현을 그저 받기만 했다. 할머니는 언제나 가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가끔씩 지나간 일에 슬퍼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끝을 알 수 없이 주었던 사랑이었기에 마음만큼 주지 못한 설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도 또렷했는데 닦고 또 닦았던 것은 방바닥만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미움이나 분노나 욕심과 같은 감정보다는 사랑에 가까이 지냈다. 그것은 절대 쉬운 일처럼 보이지 않았고 내가 과연 그녀 만큼 마음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나는 그냥 할머니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 할머니는 고요한 사람이었다. 쉽게 즐거워하지 않았지만 쉽게 동요하지도 않았고 끊임없이 부단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명절날 새벽이 되면 홀로 촛불을 켜놓고 앉아 기도했다. 가족의 건강과 번영을 기원하는 기도였다.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평온하지만 간절했다. 나는 기도 소리를 듣고 항상 반쯤 깨곤 했는데 잠이 덜 깬 상태로 눈을 감고 기도 소리를 듣는 그 시간이 좋았다. 기도를 마친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할머니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고 온화한 목소리로 "더 자~"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기도 후에 다시 살며시 눈을 감는 것은 할머니와 함께 한 달콤한 기억 중에 하나이다.
벌써 4개월이 다 되어 간다. 가끔씩 그녀를 생각할 때 눈앞이 흐려지곤 한다. 그녀에 대한 기억도 점점 흐려진다. 기억에 한계를 느끼며 삶의 유한함은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당연하게 받기만 했던 사랑을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았던 탓일까? 함께 했던 순간을 추억할 순 있겠지만 벌써 많은 것이 구체적이지가 않게 느껴진다. 우리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할머니는 경상도 여자였다. 그녀는 가끔 나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사투리를 사용했다. 그런 그녀가 죽음이 가까워진 어느 날에 역시나 경상도 사투리로 내게 해준 말이 있다.
“억지로 말고, 있는 그대로 해라이.”
앞뒤 문맥이 없어서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셨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할머니, 뭘요?”
내가 물었다.
“있는 그대로 하라꼬.”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알겠다고 그랬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내 안에 무언가 억지로 하려 했던 모습들을 돌아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삶이란 것이 참 아름다운 것 같았다.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할머니의 육신은 이제 있는 그대로의 삶인 자연 속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녀의 삶이 더 이상 자식과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있는 그대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