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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나다 Apr 14. 2023

미루는 인간 -'미루 사피엔스'

수명을 깎아먹는 미루기 습관



  나는 미루기라면 도가 튼 사람이다. 나의 몸속에 미루는 DNA가 장착되어 있어서 평생 고통받는 느낌이다.




 평소에 독서, 필사, 운동, 만보 걷기, 그림 그리기 등등을 바쁘게 해서 꽤 부지런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좋아하는 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지만, 해야 할 일들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다는 것이다.




 해야 할 일만 미루지 않고 진작 했어도 지금보다 훨씬 질 은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나의 미루기 습관은 학창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평소에 착실히 공부하는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트 필기를 열심히 하긴 했다. 벼락치기할 때 참고해야 하니까.




 수업시간에 멍 때리거나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하거나 만화 그리기 일쑤였다. 그땐 왜 그렇게 학교공부가 재미가 없었을까. 단기간에 벼락치기로 커버 가능한 내신성적은 좋았는데, 장기전에 해당하는 모의고사는 바닥이었다. (그래서 대학도 수시전형으로 갔다.)




 학교 끝나면 미술학원 갔다가 만화방에 들러 만화책을 한가득 빌려서 읽고, 반납하고 다시 빌리기를 반복했다. 그땐 빌린 만화책 읽는 게 낙이었다. (미술 입시를 1년 정도 준비하다 막판에 포기함. 비실기 전형으로 대학감.)




 라디오 듣는 것도 좋아했는데, 특히 새벽시간에 듣는 걸 좋아했다. 밤 12시부터 듣기 시작해서 연달아 듣고, 그 당시 마왕(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을 듣느라 새벽 2시인가 3시까지 내리 듣고 아침 7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안 좋은 상태로 학교에 갔다.



 그땐 날라리 같은 마왕의 말솜씨가 어찌나 위트 있어 보이던지, '오늘은 말할 기분이 아니라며' 거의 20분짜리 곡 하나 틀고 잠수 타버린 마왕이 멋져 보였다. 마왕 덕분에 인디차트 속 음악들을 많이 들었었다. 그 당시 활동했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피터팬 콤플렉스 등등의 인디밴드 곡들을 들으며 언젠가 직접 공연 보러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런 식이었으니 학교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 교과 관련 단과학원을 다닌 적도 있지만 공부할 리 만무했다. 우리 김여사는 허공에 돈을 뿌린 셈이다. 지금 아이 둘을 키우는 입장에서 학원비 몇 십만 원이 얼마나 소중한 돈인지 그 당시엔 알 수 없었다.




 김여사가 어릴 적 조기교육 한답시고 학원을 엄청 많이 보내놓고, 날 보고 조기교육의 실패작이라 한탄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말로 평생 고통받는 김여사.. 언제까지 말할 거냐며)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가 중학생 때였는데 그때는 이 말이 왜 그렇게 속상했는지 이 말을 듣고 펑펑 울었는데, 이제는 그때의 에피소드를 유머처럼 써먹는다. 듣는 사람들마다 웃음을 터트리는데 같이 웃을 수 있어 좋다.




 어쨌든 학기 중 간간히 시험은 치러야 했으니, 공부를 하긴 했는데, 일명 수명을 깎아먹는 벼락치기였다. 벼락치기는 보통 시험 보기 일주일 전부터 했는데, 점점 삼 일 전, 심할 땐 하루 전, 정말 대책 없을 땐 시험당일 새벽일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 당시엔 뇌가 말랑말랑했는지, 비록 시험 치르고 난 뒤 암기했던 내용들이 싹 다 휘발될지언정, 암기과목은 자신 있어서 내신성적이 좋았다. 특히 중국어를 만점 받았던 기억이 난다. 중국어만 전교 1등 성적이었는데, 노하우란 그저 본문내용을 싹 다 외우는 거였다. (어쩌면 내가 다닌 학교가 막 엄청 치열한 경쟁률이 아니어서 일수도 있다.) 수학이나 과학 성적은 바닥이었다.




 이렇게 벼락치기가 먹혔던 기억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서도 수명을 깎아먹는 미루기 습관은 계속 이어졌다.




 라디오 방송 대본 쓰는 것만 해도 그렇다. FLO방송이 이번주 토요일인데, 월요일에 꼭 써야지 했는데 쓰지 못했다. 화요일도 지나갔다. 수요일엔 꼭 써야지 했는데 그대로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금요일에 미용실 예약을 하고, 목요일에 쓸 수밖에 없는 시간적 제약을 걸었다. 집에선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노트북을 낑낑 매고 첫째 등교시킨 후 곧바로 스카이 카페로 왔다. 모닝 페이지를 쓰고 난 뒤 바로 대본부터 쓴다!라고 마음먹었는데 지킬 수 있을지..




 마음은 불안한데, 불안한 상태에서 놀면서 대책 없이 미루는데 도가 텄다. 점점 이 상태에 능숙해지는 느낌이다. 더불어 테트리스 하듯이 미룰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리저리 틈새시간을 맞춰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이 정도로 에너지를 소모하느니, 그냥 미리 써버리는 게 훨씬 생산적이지 않을까. 잘 알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 와중에 목요일에 충실히 대본 쓰기 임무를 완성한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다. 아마도 금요일 미용실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금요일까지 미뤘을 테지만. 오늘도 나는 '미루 사피엔스'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중이다.




제발 날 좀 누가 말려주세요!




(약 4만 년 전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를

미루는 인간 -> '미루 사피엔스'로 꼬아 만든

용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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