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π)송을 연주해 보고 싶은데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보고 나서

by 손나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보고 왔다.

두 딸들이 할미 집에서 자고 온다 해서 남편과 오랜만에 심야 영화관 데이트했다.


나는 수학을 단 한순간도 좋아한 적 없는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였다.

(모의고사 칠 때 다 찍었는데 점수 한 자릿수 나왔다.)


영화 버프 덕분인지 수학도 음악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수학이 아름답지 않냐는 최민식 배우의 물음에 수학을 좋아한 적 없던 나도 세뇌당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수학 문제를 마구 풀고 싶은 욕구가 치솟을 만큼 버프가 센 건 아니었다. 부스터를 맞아도 그럴 일은 없을 듯하다.


그래도 이건 알겠다.


아무 조건이나 불순한 의도 없이 그 자체를 사랑하며 몰두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수학만큼이나 아름답다.



영화 속, 원주율의 숫자로 만든 파이송 연주를 듣고 있노라니 갑자기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다. 요새 들어 피아노가 너무 배우고 싶다.


책을 읽다가 글을 쓰게 되고 그림 감상을 하다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처럼 연주곡을 듣다가 피아노를 배울 판이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피아노 학원 가기 싫다고 동생과 편먹고 엄마와 대치했던 게 생각난다. 동생은 피아노 치기 싫다고 울면서 쳤다.


‘그렇게 다니기 싫으면 다니지 마!’


화가 난 엄마는 당시 4층인가 5층의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피아노 학원 가방을 던졌는데 아무도 주워오지 않아서 결국 엄마가 다시 주워왔다.


피아노를 어린 시절 배웠을 때의 이로운 점이 뭘까.


손가락을 많이 움직이면 뇌가 말랑해지나. 집중력이 높아지고 박자 감각이 좋아지나. 집중력이 높아지면 학습능력에 도움이 되나.


어린 시절 피아노에 대한 기억은, 체르니를 욕하면서 쳤다는 것.

이 정신 나간 체르니는 대체 이 지루한 연습곡을 어디까지 만들어 놓고 간 거지?

피아노를 사랑하는 학우들을 다 떨어져 나가게 할 요량으로 얼마나 버티는지 테스트용으로 만든 건가.



체르니 30번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이십몇 번에서 그만두었던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된 지금은, 악보 보는 방법을 다시 익힌 뒤 피아노 연주를 다시 해보고 싶다. 아름다운 피아노곡의 선율을 들었을 때 단지 듣고 마는 것에서 만족할 수 없다. 직접 치면서 그 곡의 아름다움을 각인 새기듯 손가락 깊이 새겨보고 싶다. 하고 싶은 게 많아서 큰일이다.



첫째 만삭 때 예정일을 한 달 앞두고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싶어서 피아노 학원을 찾아갔었다. 예정일 한 달 전까지 일했기에 아이가 태어나기 한 달 전인 이때야말로 피아노를 잠시나마 다시 배울 기회라 생각했고, 언제 언제 다시 배우러 오겠노라고 상담하고 돌아섰는데 다시 가지 못했다.



첫째를 37주에 갑자기 출산하게 된 거였다.


어린 시절 체르니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곡의 악보를 연습했다면 더 길게 피아노를 칠 수 있었을까. 손가락 기르는 힘이 필요했고, 기초는 어쨌든 중요한 거니까 체르니를 좀 더 열심히 연습해야 했을까.



며칠 전 동네를 산책하다가 상가에 새롭게 피아노 학원이 오픈한 걸 발견했다.

언젠가 불쑥 들리고 싶다.



‘안녕하세요. 파이(π)송을 연주해 보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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