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글부글, 행복해도 될까요?

라면과 함께 춤을

by 손잎의 노래

늦여름 오전 10시,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출근은 했지만 살짝 출출할 시간이지. 오늘은 직원식당에서 특별히 서비스 메뉴를 제공하는 날이야. 거창하고 복잡한 메뉴 따위는 바라지도 마. 왜냐고? 무료로, 호의로 주는 거니까. 좀 늦게 시작하고 늦게 끝나는 날, 일 년에 한두 번 제공되는 그 메뉴는 늘 똑같지만 늘 설레게 하는 매력이 있어. 더울 때 먹어도 맛있고 추울 때 먹어도 맛있고, 비 올 때 먹어도 맛있는 만능메뉴. 이제 뭔지 알겠지? 뭐라고? 건강에는 썩 좋지 않은 거 아니냐고? 그리고 이따 점심시간은 어떡할 거냐고? 그런 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일 년에 한두 번이라니까. 그리고 오전이잖아. 이런 재미도 업어서야 되겠어?


오늘따라 말이야. 특히 오늘은 말이야. 처음부터 지켜보고 싶더라고. 즉석라면조리기에 올려져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부터 하나하나 말이야. 그전에는 올려두고 신경도 쓰지 않고 스마트폰이나 보고 있다가 무슨 소리가 나면 달려가곤 했는데, 오늘은 처음 등장부터 좀 달라 보였어. 깔끔한 스테인리스 냄비에 밝은 노란색 생라면이 놓여있었는 게, 냄비가 깔끔해서인지 라면 주위에 은색의 후광이 뻗어 나가는 것 같았어. 적당히 화장을 잘해서 파운데이션이 잘 먹은 날 있잖아. 그런 얼굴 느낌 알지? 봍터치와 립스틱처럼 가운데 붉은 수프 가루가 뿌려져 있었지. 강렬하고 유혹적이었어. 기대와 희망으로 곧 터져 나올 뭔가를 기다리는 모습은 나름대로 단단해 보였지. 한평생 그 누군가를 위해 한 올 한 올 정성껏 말아 올려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저 강인한 곡선들.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된 4각의 몸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듯 오히려 편안해 보였어.


이제 버튼을 누르고 조리를 시작할 차례야. 나는 '꼬들면'을 눌렀어. 난 뭐든 좀 단정해 보이는 걸 좋아해.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계든 '불은면' 상태가 되면 너무 퍼지게 되고 경계도 없어지게 되어버려서, 감당이 안되더라고. 적당한 선을 두고 존중하는 깔끔한 관계들이 좋아.기억해. 꼬들면은 딱 2분 30초야. 이제 마술쇼를 시작하는 거야. 마술사가 "꼬들면'이라는 마술을 외우니, 뜨거운 물이 쑤욱 나와 냄비 안으로 쏟아지지. 놀아운 일이 벌어지지 시작하지. 이제까지 잠잠히 기다렸던 무생물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거야. 처음에는 얌전하게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지. 그런데 나는 벌써 그때부터 웃음이 나기 시작하더라고. 좀 전에 그 엄숙하고 견고하던 그 모습이 하나하나 해체되고 깨어지는 모습이 유쾌했어. 살짝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랄까? 기까이 망가지는 마음씨 착한 옛날 귀족처럼. 혹은 무더운 날씨에도 머리를 땋은 무거운 가발을 쓰고 끙끙대던 영국 귀족이 땀띠라도 나서 어쩔 수 없이 가발을 내려 놓는 것처럼.


조금씩 물이 끓기 시작하자 이런, 온몸을 흔들면서 웃어 대지 뭐야. 꽁꽁 풀리지 않도록 온갖 매듭으로 묶어둔 몸과 마음이 하나하나 풀려가는 그 기분이 얼마나 기뼜겠어? 부글부글 끓는 동안 부글부글 끓을수록 너무 행복해 보였어. 몸은 더 격렬하게 흔들리면서 더 큰 소리로 깔깔 대고 웃었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모습이었어.. 가장 알맞은 시간과 가장 알맞은 자리에서 딱 맞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이지. 나한테 살짝 알려주더라고. 나도 진짜 웃기 시작했어. 부글부글 끓으며 춤추는 라면처럼 부글부글 웃었어. 나도 라면처럼 가장 알맞은 시간과 가장 알맞은 자리에서 가장 알맞은 상태로 있다는 걸 알았어. 부글부글 행복했어. 세상에, 행복한 라면을 다 보다니, 행복한 라면을 보고 나도 행복해하다니, 오늘은 행복한 날, 라면 먹은 날, 라면이 웃는 날, 라면이 춤춘 날, 라면이 행복한 날. 행복한 라면을 본 날. 나도 행복한 날. 계속 돌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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