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 2일째
오늘은 누군가 살짝 기울인 옆얼굴과 긴 머리카락을 보았다. 가을이었나 보다. 환영처럼 멀리 혹은 흐리게 보이지만, 조금씩 더 깊어지는 빛깔과 소리들에서 가을을 느낀다. 아직 풋가을이라 향은 진하지 않지만 뭔가 조금씩 익어가고 있다. 더위도 한층 나긋나긋해졌다. 성나있던 아스팔트도 조금씩 제정신을 차려가간다. 너무 뜨겁고 날카로워서 가까이 가 볼 엄두조차 못 내던 하늘도 한결 갸름해졌다. 고생시켜 미안하다는 듯 가끔 부끄러워하며 , 한층 위로 더 올라간다. 더 높아지고 투명해졌다. 살짝 구름에 가려진 붉은 노을로 보일 듯 말 듯, 수척해진 얼굴은 훨씬 고혹적이다. 한바탕 깊은 실연과 사랑을 겪고 성숙해진 연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랑스럽다. 벌써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꼭 이렇게 해야 할까 묻는 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쩌면 하루라는 일생의 마지막을 정리한다는 것은 나름 의미 있고 멋진 일이다. 나의 하루에 대한 유서를 쓰는 일, 그리고 진짜 마지막이 아니라는 희망도 함께 있으니 진지하지만 또한 얼마나 희망적인가? 오늘도 모두가 각자가 제할일을 하고 누군가는 스러지고 누군가는 태어났다. 나도 그중에 하나의 존재 상태이며 순환한다. 쓸데없는 시간을 많이 보냈으며 쓸데 있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할 일을 잘 못하는 편이라 거의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지 않아 좋지만 또 누구 탓을 절대로 할 수 없기도 하다. 오로지 내 몫이고 내 책임이고 내 탓이다. 애누리 없이 심플하다. 후회는 없다. 후회가 있다면 아깜없이 사랑하지 못한 일뿐이고 그 외에는 여한이 없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무언가 추구하고 살지 않도록. 그렇게 실링살랑 바람처럼 구름처럼 스치는 머리카락처럼 슬며시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성취감 없이 무채색의 그림자가 되어 가는 것 같아 하루에 한 번 이렇게 흔적을 남겨 보기로 했다. 9시의 루틴, 이것이 나를 살아가게 하고 움직이게 만들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루틴을 너무도 싫어했던 나에게는 도전이지만 오늘은 어쨌든 성공이다. "살아 있네!"라는 영화대사처럼 나는 살아있다. 그리고 오늘도 글을 쓴다.
오늘 나를 흔들었던 질문 하나. '무엇이 당신의 무릎을 꿇게 하는가?" 글쓰기에 대한 책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무언가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것만이 우리의 무릎을 꿇게 한다. 그만큼 자신에게 절실하고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정말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바로 하는 몇 안 되는 천재가 있을 수 있지만 아마 나에게는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 자체인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한 꿈같다. 삶도, 오늘도, 굿 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