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비 내리는 날

느닷없이 비가 오고 그대가 가고

by 손잎의 노래

남도의 어느 작은 소도시. 이젠 조용히 여름이 지나가나 싶었지만 느닷없이 비가 쏟아졌다. 삽시간에 근처 하천이 불어나고 지하 주차장에 물이 차올랐다. 갑자기 세상이 재난영화가 되었고, 우리는 재난에 휩쓸리는 엑스트라의 일부가 되었다. 신기한 것은 놀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잦은 장마와 다양한 자연재해를 겪은 탓에, 웬만한 재난에는 놀라지 않는다.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웠다. 지하주차장에서는 민소매와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재난 속에서도 현실을 살아야 하는 구릿빛 사람들, 차와 함께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지만 갇혀버렸다. 갑작스러운 비에 놀란 아파트 측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입구를 봉쇄했다. '지하주차장 침수'. 또 하나의 바이러스 이름처럼 우리에게 익숙하다. 백신으로 우리 몸에 이미 획득된 면역체계처럼, 우리 사회는 다양한 재해에 대한 즉각적인 매뉴얼이 생겼다. 몇 명의 관리자들이 나와 지하주차장의 바닥에 흥건해진 물을 닦고, 지상에서는 검은색 비옷으로 무장하고 쏟아지는 비를 맞아가며 바리케이드를 높이느라 여념이 없다. 입을 꼭 다물고 다들 진지한 표정이다. 재난 영화에서 나오는 살짝 장엄한 음악이 빰~하고 흘러나오는 듯하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는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끄덕인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누군가는 교대로 감시하고 지켜봐야 한다. 변덕이 심한 날씨 탓에 누구도 앞을 장담할 수 없다. 잘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숙연했다.




그날은 하필 누군가의 기일이었다. 굳이 따진다면 매일이 누군가의 기일이겠지만, 특히 인연이 있는 누군가의 기일에는 하루종일 먹먹하다. 하루의 시간들이 조금씩 느려지고 중력은 2배로 무거워진다. 한평생 고생만 하다가 이제 좀 숨 쉬고 살만해졌는데, 고개 한번 못 펴고 바쁘게 살다가 이제 하늘 한 번씩 볼 수 있는 여유를 찾았는데, 갑자기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 진짜 사랑 한 번 해본 사람이 떠난 날이었다. 대하소설의 주인공처럼 굴곡진 인생과 지고한 사랑을 지켜 온 그 굵고 새찬 마음처럼 비가 내렸다. 슬프지만 한스럽지는 않은, 오히려 조금은 후련한 비였다. 어찌 보면 남들에게는 불행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올곧고 고결한 인생이다. 아무나 그러하지 못하고 특히 요즘에는 아무도 그러하지 못하는 순정. 오늘의 비는 순정 그 자체였다. 어떤 가식도 남기지 않고 쓸어내어 버리는 새찬 빗줄기. 여기 그런 인생이 있었노라고 하늘을 열어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잠시 묵념하였다.




어떤 음악의 첫 소절, 아니 첫 음을 듣고 단번에 숙연해진 기억이 있는가? 우연히 듣게 된 그 곡은 6초 동안 관악기인지 현악기인지 알기 힘든, 약간의 긁히는 듯한 묘한 울림이 있는 소리가 지속된다. 아, 이게 무얼까? 바로 정체가 밝혀진다. 극적이며 가슴을 마구 뒤흔드는 첼로 연주가 1분 동안 나오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까지는 서막에 불과했다. 갑자기 뭐라 말할 수 없는 깊고 깊은 아름다움과 숙연함의 세계로 확 들어가 버리게 된다. 주인공은 트럼펫이다. 눈물이 나올 듯하면서도 그 소리에 온몸을 맡기고 이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트럼펫 연주자 크리스 보티 Chris Botti가 연주하는 ‘Emmanuel’이다. 제목인 임마누엘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움을,이런 팝 음악에서 악기 한 두 개로 느낄 수 있다니 놀랍다. 원곡 작곡가는 미셀 콜롬비에(Michel Colombier이며 최초의 팝 교향곡, 최초의 록 오라토리오라는 극찬을 받은 앨범 윙스에 실린 작품이다. 특히 이렇게 장대비 오는 날이나, 노을이 아름다운 날 해 질 녘에 들으면 한순간에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숙연한 아름다움에 빨려 들어간다.

이미지 2023. 8. 23. 오후 10.09.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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