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부르는 야유회

별이 진다네, 여름이 진다네

by 손잎의 노래



글쓰기에는 작은 온기가 필요하다

일단 책상에 앉았다. 아직 내 손은 완고하다. 키보드에 닿는 손끝은 차갑고 달아오르지 않았다. 매일 이 시간에 지나가는 기차는 지금도 그러고 있냐고 긴 한숨을 내쉰다. 키보드가 달아오른 철판정도 된다면 내 손가락 끝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미친 듯이 꿈찔꿈찔 대겠지만, 몇 년 전에 산 맥북 에어 노트북 키보드는 너무나도 이성적이며 절대 동요하지 않는다. 은색으로 빛나는 몸체는 오히려 얼음장처럼 차갑다. 이 차가운 몸을 내 손끝으로 녹여야 한다. 밀양 얼음골에 있는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눈처럼 그렇게 혹독한 더위에도 덥혀지지 않는 건, 절대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문을 닫아버린 마음 탓이리라. 하루 내내 그저 보고 듣고 먹기만 하고, 그 순간순간을 깊게 느끼거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개미떼처럼 수없이 몰려다니던 감정들은 표현되지 못해 너무도 초라하게 울고 있었다. 울다지친 마음은 문을 닫아버린 모양이다. 오늘 또 얼마나 어르고 달래주어야 마음이 풀릴 수 있을까? 벌써 걱정이다. 조각글이라도 쓸 수 있으려나?



어떤 야유회

오늘은 가을을 엿보는 조촐한 외출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 어떤 단체 야유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관광버스를 타고 모자를 쓰고 비닐봉지에 나눠준 간식을 까먹었다. 마이크로 누군가 사회를 보고 박수를 치고 노래를 따라 하고 환호를 질렀다. 인원 점검에서부터 뭐든 늘 챙겨야 하는 인솔자는 언제 봐도 참 부지런하고 기특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쉬고 먹고 마시고 놀기만 하면 된다. 시간시간 조금이라도 지루할 까봐 나와서 노래도 시키고 직접 노래도 하는 건 결국 인솔자다. 중요한 말을 강조하느라, 한 말을 또 하고 다시 해서 놀림을 당하기도 한다. 오늘의 반복되는 멘트는 이거였다. ‘오늘 메뉴는 4만 원짜리 회정식입니다. 작년보다 5천 원이 올랐는데 그건 물가가 올라서 그렇습니다. 저기 박수 안치고 노래 안 하시는 분들은 1만 원짜리 돈가스 먹습니다. “ 한 10번은 들은 것 같다. 그렇지.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하면서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집에 돌아왔을 때도 한참동안 그 말만 귀에 쟁쟁했다. 인솔자가 아닌 나는 너무도 태평하게 버스 창가에 기대면서 '회정식은 사만 원인데 저 높이 떠 있는 맑은 구름은 얼마일까?' 생각했다. 하늘은 영락없는 가을이었고 땅은 아직 초록이 점령하고 있는 늦여름이었다. 벼 이파리와 줄기들이 늘어선 모습들이 참 고왔다. 초록의 부드러운 물결들이 눈을 황홀하게 했다. 비와 햇빛을 동시에 맞아 온통 투명해진 세상을 배경으로 드러나는 초록빛은, 너무도 싱그러웠다. 비가 쏟아졌다가 살짝 개었다를 반복하며 야유회 날씨로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흐린 하늘 사이로 비치는 밝은 햇빛이 비추는 초록빛에 완전히 취해 버렸다.




여름을 기리는 노래, 가을을 만나는 노래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아직 여름이어서 들리는 건지, 가을이 다가오니 더 들리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멀리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는 그냥 참 좋다. 함께 고독해지고 살짝 쓸쓸한 마음도 들지만, 저 풀벌레들과 함께 존재하고. 함께 들어주고 함께 울린다는 느낌이 들어 외롭지 않다. 여름의 눅진함을 씻어주는 청량한 그리움과 서늘한 포근함이 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전에 먼저 여름밤을 열어주는 소리가 있으니….. 그 소리로 전주가 시작된다. 1989년에 발표된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라는 노래다. 예전 여름 한창일 때 이 노래를 많이 들었다. 가을이 막 다가오는 이 시기에, 멀어지는 여름을 기리고 싶어 졌는지 이 노래가 생각났다.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컹컹 나고 귀뚜라미도 따라 운다. 그 소리들이 노래에서 나는 건지 실제로 나는 소리인지 감별하기 힘들다. 실제 나는 소리로 착각할 만큼 선명한 자연의 두런두런한 소리들, 그 자체 만으로도 마음이 확 풀린다. 아름다운 기타 선율이 투명한 백색 소음들과 어울리면 완벽한 한여름밤 자체이다. 노래가사가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도 누군가 세레나데를 불러준 것 같다. 드디어 ‘어제는….’하고 노래가 시작되면, 그 뒤의 노래가사처럼 온 마음의 장벽이 그냥 무너진다. 풀벌레 소리와 어울어진 목소리가 너무 감미로워, 별이 지기도 전에 마음이 녹아버린다. 첫사랑 소년, 소녀를 만나 첫눈이 반한 그 순간처럼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그 기분 좋은 무너짐으로 그렇게 진짜 노래가 시작된다. 언제 들어도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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