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바람이 분다
#1
참 이상하지? 비가 오면 꾹꾹 참아두었던 이별의 기억이 바로 오늘처럼 생생해진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이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유리창 밖에서 나에게 한 마디씩 소리치는 것 같아. '나를 잊은 거니....., 나를 사랑했던 거니?, 나를 잊을 거니? 다시......' 빗방울은 맑은 소주처럼 진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취중진담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안주도 없이 그에게 술잔을 내민다. 새우깡 한 봉지 놓고 밤새 소리에 취하던 양철지붕 밑의 술자리에서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고독이 커져 간다. 비 오는 날은 그렇다. 오늘도 그렇다. 오늘은 특히 그렇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추억하게 되는 이 생생한 추모의 현장에서, 나는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그대를 잘 보내야 한다. 끝까지 올지 않아야 한다. 그대가 가는 길에 투명한 꽃비를 뿌려 주어야 한다. 얼굴은 보지 않겠다. 이제 잘 가야 한다. 당신은.. 내 사랑이었다. 내 사람이여.
#2
바닥이 온통 진한 녹색인 옥상에 한참 비가 내린다. 녹색 바닥 위에 내린 비는 완전히 녹색으로 물들었다. 투명하고 조심스럽던 빗방울은 아주 진한 녹색의 바다로 출렁였다. 한 올 한 올 가녀린 옷깃 같았던 빗방울은. 스스로 날개를 벗어버린 선녀처럼, 익숙한 순결을 버리고 낯선 지상에 정착하였다. 정체성을 훌쩍 벗어던진 완벽한 변신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그 어떤 힘이 이 생경한 녹색의 바다에 몸을 던지게 했을까? 어떻게 완벽하게 한 몸이 되었을까? 그 알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부르는 걸까? 이별이라고 해야 하나, 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빗방울은 첨벙이며 바다로 사라졌지만,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눈물방울은 내 눈가에 고요히 맺혔다.
#3
전쟁 같은 더위 끝에 심상치 않은 바람까지 몰고 온 이 빗속에서, 나는 오래 참아온 듯한 누군가의 짙은 고백을 듣는다. 더위를 견뎌온 여태 살아 있는 것들의 깊은 울음 같기도 하고, 살짝 눈물을 훔치는 애잔함 같기도 하다. 더워서 혼미해졌거나, 미쳐버린 채 살아남지 못한 것들의 짧은 장송곡 같기도 하다. 서로 너무 뜨거워 극단적인 사랑을 하는 연인들처럼 가뭄과 장마, 폭염과 폭우 속을 오갔던 길고 긴 여름날이었다. 애중이 하늘을 찌르는 듯했고 서로는 지쳐갔다. 갈 때까지 간 팽팽한 고무줄처럼 양 극단에서 마지막 선택을 서로에게 미루루었다. 36.5도 체온을 넘나드는 온도에 멸종 직전의 코뿔소처럼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우리는 이 비를 맞았다. 조금은 아프지만 끝내야 할 시간이다. 천둥처럼 울지 않지만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던 그 마음속의 커다란 구멍에서 묵직한 바람소리가 난다. 태풍은 그렇게 오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음으로 사랑했고 살아남아서 이별했다. 그대가 가니 비가 오고 이렇게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