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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디 Dec 31. 2021

좋아하는 단어

오래 된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말이면 마니또로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연례 행사를 하곤 했었다. 다들 그렇듯이 쪽지를 뽑아 선물을 줄 친구를 정하고 연말에 날을 잡아 1~3만원 정도의 선물과 함께 카드를 써서 전달하며 친구들과 한 해를 마무리 했다. 그러다 작년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들로 마니또를 하지 못했고, 올 해 역시 두 명이나 해외에 있는 데다가 주말 없이 일하는 친구들이 있어 연말을 핑계로 얼굴 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사실 마니또가 연례 행사였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남자친구를 보고 기억에서 사라졌던 마니또가 생각이 났다. ‘우리 마니또하자!’고 친구들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고 그 뒤로 며칠 간은 ‘서로 만나지 않고 마니또 정하는 방법’에 열을 올렸다. 이러저러한 방법을 논의한 끝에, 카카오톡의 익명투표 기능과 사다리 게임을 이용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각자 익명 투표로 동물을 한 마리씩 고르고, 선물을 줄 친구들과 선물을 받을 동물을 사다리 게임으로 매치하는 방법이었는데, 조금 더 재미를 더하고 혹시 본인이 본인에게 이어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질문의 익명 투표를 만든 뒤 사다리 게임을 돌리는 방법으로 최종 결정이 났다.

질문은 겨울에 들어야 하는 음악, 내가 좋아하는 단어, 세계 여행을 간다면 마지막 여행지 등 총 4개의 질문이었고 사다리 게임에서 한 명이라도 스스로에게 연결된 경우를 제외하니 “내가 좋아하는 단어”로 마니또가 결정되었다. 예를 들면, “사랑해”라고 적은 사람은 친구 A에게 “소중해”라고 적은 사람은 친구 B에게 선물을 주는 식이었다. 우리는 “그런 거 없음” (겨울에 들어야 하는 음악) 님에게 선물을 받을 뻔했는데 “반짝반짝”님에게 선물을 받게 되었다며 즐거워 했다.


빠르게 답을 적어 내느라 질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그 뒤로도 나는 자동차나 기차 안에서 시간을 보낼 때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프랑스어 중에서는 “Petit”라는 단어가 좋았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작은, 어린 등의 뜻이지만 다른 언어로는 잘 전달되지 않는, “Petit”만의 독특한 어감이 있다. 양이 적은 것을 표현할 때도 종종 사용되는데, 예를 들면 주말 정도 다녀오는 짧은 여행을 “Petit voyage”, 열차 내 안내방송에서 기본 안내 사항 외의 몇 가지 추가적인 안내 사항을 “Petites informations”이라고 표현한다. “짧은 여행”이나 “몇 가지 안내사항”이 객관적인 표현이라면 petit는 조금 더 대화체랄까,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뉘앙스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대단한 건 아니니 기대하지 마세요, 그래도 아주 사소한 건 아니에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프랑스어로 친구를 뜻하는 “ami(e)” 나 “copain / copine” 에 petit를 붙이면 여자친구, 남자친구라는 의미가 되는데,(petit ami, petite copine …) 그런 걸 보면 Petit 라는 말 자체에 어리고 여린 존재를 어여쁘게 여기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모국어가 아니기에 나 좋을 대로 상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쁘띠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소소하지만 사랑스러운 느낌, 익숙한 발음이 주는 정겨운 분위기가 좋아 나는 곧잘 이 말을 여러 단어 앞에 붙여 사용하고는 한다.


우리는 왜 늘 사랑을 낙서할까?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니며 다양한 모국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다시 이 질문을 던지는 것도 꽤 재미가 있었다. 늘 그렇듯, 설문 조사의 시작은 나의 남자친구다.

“쟈키야, 쟈키는 좋아하는 단어가 뭐야?”

“나? Je t’aime”

내 남자친구는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를 말해보라고 했을 때도 “Je t’aime.” 라며 “이 말에 세 단어가 있어.”라고 대답했었다. 면역이 된 덕분에 덥석 감동을 받기 보다는 이런 낭만적인 감성은 개인 특성인걸까 아니면 프랑스인의 특성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방심하고 있는 순간에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다.

또 한 번은, 학교 친구들이 기숙사 방에 모여서 술 한 잔을 하던 날이었다. 돌아가면서 좋아하는 단어 하나씩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는데, 다른 화두로 대화가 넘어가면서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고 내가 물어본 질문은 흐지부지됐다. 다시 물어보기도 뭐해서 ‘그럼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옆에 앉아있던 브라질 친구가 자기 차례에 얘기하려고 생각해 두었다며 자기는 cafuné라는 단어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손가락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행동을 뜻하는 말이다. 연인끼리 혹은 어린 아이들에게 많이 쓰는 단어라고 하는데, 그 의미를 설명해주는 친구의 표정이 참 다정하고 따뜻했다. 

며칠 뒤 단어의 철자를 다시 물어보자 친구는 단어의 의미와 어원을 설명하는 블로그 링크를 함께 보내주었다. Cafuné는 아프리카 요루바족의 언어에서 유래된 말로 브라질에 플랜테이션 농업 노예로 팔려 온 아프리카인들을 통해 브라질로 전파되었다. 처참한 노예 생활 중에도 서로에게 애정을 담은 손짓인 Cafuné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짧은 몇 개의 음절에 담긴 고통과 따뜻함에서 나 역시 이 단어가 좋다고 말하기가 망설여질 만큼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고등학생 때 수능 언어영역 비문학 지문으로 종종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의 이론인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에 대해 나오곤 했었다. 언어영역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기억에서 날아갔던 다른 지문들과 달리 “나무”와 나무를 뜻하는 프랑스어 “arbre”를 예시로 기표와 기의가 무엇인가 하는 설명을 읽은 기억이 선명한 건, 당시에 프랑스어를 막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의미하다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signifier”의 현재분사와 과거분사 - 영어의 ing 형태와 p.p 형태 - 로 Signifiant은 의미가 표현되는 형태, 즉 글이나 말 등을 뜻하고 Signifié는 의미하는 실체를 뜻한다. Signifiant이 같더라도, 즉 같은 “나무”라는 표현이라도 개개인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signifié는 다르다는 것이 – “나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나무의 형태 등 – 그 당시 지문들의 주내용이었다. 

나와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오랜만에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에 생각이 미쳤다. 언어의 의미는 자의적이며, 언어의 표현과 의미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다. 어떤 단어는 단어의 발음이나 글씨가 예뻐서 좋았지만, 그보다 많은 단어들은 사람들이 그 단어에 투영한 의미와 사연 때문에 아름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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