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는 유라시아 대륙을 날아 샤를 드골 공항(Aéroport de Paris-Charles de Gaulle)에 착륙한다. 묘하게 달라진 공기의 냄새와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환영 간판에 이미 공항에서부터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 온 것이 실감난다. 그렇지만 아직 파리에 도착한 건 아니다. 서울의 국제 공항이 인천에 있는 것처럼 파리 국제 공항은 파리에서 30KM 정도 떨어진 루아시 (Roissy)에 있고, 여기서부터 파리에 가려면 다시 도시 철도나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은 가야 한다.
유럽 내 저가 항공사 비행에 주로 이용되는 파리의 다른 공항들 – 보베 (Beauvais)와 오를리(Orly) – 이 지역명을 공항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과 달리, 프랑스 제1공항인 파리 샤를 드골 (Charles de Gaulle)은 프랑스의 18대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샤를 드골은 제2차 세계대전 말, 파리를 나치 치하에서 해방시켜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약 10년 뒤인 1958년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프랑스로 들어오는 가장 커다란 관문에 샤를 드골의 이름을 붙인 것도 샤를 드골이 프랑스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폴레옹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뒤 돌아와 세운 개선문 (Arc de Triomphe)이 위치한 광장의 이름 역시 샤를 드골이다. 원래 광장을 감싸고 있는 대형 원형 교차로의 모양을 본따 에뜨왈 광장 (Place de l’Etoile)이라 부르다가 1970년에 샤를 드골 광장(Place de Charles de Gaulle)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샤를 드골 광장과 개선문은 프랑스 근현대의 승리와 희생의 기억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다. 1945년에 샤를 드골 장군이 파리를 해방시킨 뒤 행진을 한 곳이기도 하며, 광장 중앙에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무명 용사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어 지금도 매해 프랑스를 위해 싸운 참전 군인들을 기념하는 추모식이 열린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신원이 파악된 군인의 시신은 따뜻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갔을 테지만, 참전 군인을 대표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이 신원 미상의 ‘누군가’라는 사실엔 가슴이 뭉클했다.
귀여운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두 팔을 지렛대로 사용하는 형태의 와인 따개의 별칭 역시 샤를 드 골이다. 위쪽 손잡이가 머리, 양 쪽으로 펼쳐진 지지대가 팔의 형태로 사람 모양인데다 골격도 단단하니 반박할 수 없는 장군님의 모양세이다.
파리의 공항, 대표적인 광장, 심지어 와인 따개의 이름으로 쓰일 만큼 대중적으로 높은 존경을 받는 샤를 드골이지만, 사실 외국인인 나는 최근까지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샤를 드골에 대해 더 공부하기 시작한 건, 동네 도서관에서 읽은 프랑스 역사책에서 샤를 드골을 발견한 후부터다. “프랑스의 식민지 이야기” (Petite histoire des colonies françaises) 는, 아기자기한 그림과는 달리 내용이 너무 어려워 프랑스어 공부를 하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었다. 난해한 구절과 문장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대충 넘기는 와중에, 딱 한가지 내가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샤를 드골이 프랑스의 대표적인 식민지배 옹호론자였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주변 국가들에게 식민지 유지 의사를 강하게 피력했던 샤를 드골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식민지배지에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국제적인 흐름에 의해 식민지를 해방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샤를 드골은 프랑사프리크 <Françafrique> 라는 기구를 설립해서 아프리카의 식민국가들이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샤를 드골은 각국 독재정권과 결탁해 식민 패권을 유지했고, 프랑스어 공용어 사용, 프랑스 해외 영토나 과거 식민지 사용 통화인 CFA 프랑 사용, 국가 위기 시 프랑스 군인 개입 등 현재까지도 아프리카의 이전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 편, 1950년대 후반 프랑스의 식민지는 모두 해방되었지만, 100년 가까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프랑스의 일부’라는 인식으로 인해 독립에서 제외되었고, 샤를 드골은 1958년에는 알제리를 프랑스의 영토로 인정하는 연설로 이를 공식화했다. 이로 인한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 전쟁과 경제적 위기로 인해 마침내 프랑스가 1962년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기까지, 알제리 해방전선을 주축으로 한 알제리의 많은 국민들이 프랑스 극우파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리고 알제리와 프랑스의 역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중이다. 2021년 마크롱 대통령이 알제리의 친 프랑스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발언을 해 알제리가 프랑스 군용기의 영공 통과를 거부한 사건이 있었으며, 1961년 알제리인 학살에 대해서 프랑스는 여전히 국가 차원의 배상을 회피하고 있다.
내가 알제리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수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나라 중 한 나라의 사람이라면 어떨까. 본인의 이익을 위해 내 나라의 언어와 인권과 자원을 헐값에 빼앗고 끝까지 그 역사에 무책임했던 대통령의 이름을 딴 공항을 통해 프랑스에 간다. 프랑스가 평등이나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만 봐도 속이 타지만 한편으로는 더 나은 경제적, 교육적인 풍요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땅임을 부정할 수 없다.
도서관에 다녀온 날부터 프랑스 안에서 샤를 드골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하는 운동은 없는지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의 움직임은 없는 지 며칠을 인터넷에 뒤져보았다. 식민 지배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려는 운동은 아주 미미했고, 몇 년 전만해도 샤를 드골을 주인공 삼은 영화가 나왔으며 드골의 막내딸을 기려 설립된 안느 드골 재단 또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걸 보면서 프랑스에 나와 있는 것 자체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
샤를 드골이 프랑스의 상징이자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을 받는 것에 이토록 분개했던 이유는 우리 나라 역시 식민지배를 당했던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걸, 그렇기에 프랑스의 대처 하나 하나를 우리 나라와 일본의 역사에 빗대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자원과 인력으로 부를 축척한 전통적인 강대국의 사람들이라면 내가 아무리 샤를 드골에 설명한다해도 그다지 분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어릴 때 국사 수업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우리 나라는 너무 조그맣고, 혁명이란 혁명은 죄다 실패했으며 식민지 역사에 아직까지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 문제까지 잘 풀려온 일이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한국사 수업을 놓은 지 10년도 지난 지금, 구만리 먼 타국에서, 식민 지배를 받았던 역사가 오직 ‘일본과의 대결은 무조건 이긴다’라는 전투의지만 심어 놓은 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많게는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신의 들을 빼앗겼던 모든 나라들이 온전한 봄을 되찾기를. 그 곳의 사람들이 더 자유롭고 안정적이며 풍요로워지기를. 그리고 어쩌면 샤를 드골 공항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 의사를 표시할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영향력있는 나라들이 되기를 응원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