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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디 Jul 10. 2023

사랑이 시작된 파리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의 여름. 파리에서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 때 오랜 친구였던 우리 관계가 변했다.



2012년 교환학생으로 갔던 보르도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간 우리는 간간히 연락을 주고 받으며 사이를 이어왔다. 보르도에서 다녀온 뒤로는 어림잡아 1-2년에 한 번 얼굴을 봤으니 알고 지낸 세월만큼 서로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단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상냥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로 엄마와 언니와 휴가를 떠났을 땐, 마침 인간 관계에 결핍감을 느끼던 때였다. 나는 10 만큼의 감정이 있어도 50을 표현하는 사람이었고, 그만큼 상대방도 나에게 표현해주기를 바랐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을 - 이따금씩 느껴지는 연인의 무심한 말과 행동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았고, 당시 마지막 연애는 영혼의 단짝이라 생각했던 상대방의 권태기를 지나면서 이 사람과 평생 함께 한다면 마음 한 켠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으리라는 두려움으로 끝이 났다.



그처럼 심적으로 혼란하던 20대 후반의 여행자에게, 쟈키는 한없이 다정했고 파리는 아름다웠다. 런던에서 파리로 다시 돌아온 첫 날, 나는 엄마와 언니와 함께 쟈키를 만났다. 파리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쟈키는 나의 가족을 위한 선물을 가져왔고, 에어비앤비에서는 온수 문제를 해결해주고 함께 준비해 디저트를 먹었다. 엄마가 고맙다며 저녁을 사고 싶어해 우리는 여행을 마치기 전 마지막 밤에 숙소 근처의 브라세리에서 함께 식사를 했고, 식당을 나온 뒤 나와 쟈키는 개선문의 야경을 보러 갔다.   


8월 말 파리의 밤은 서울과 달리 선선했다. 개선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야간 입장 시간이 지나버려, 우리는 그저 정처 없이 파리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개선문을 지난 뒤 쪽 거리는 커다란 상점들이 즐비한 샹제리제와 달리 아담한 건물들에 간간히 브라세리와 카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쟈키의 차에 달린 결혼식 장식에서 시작해 우리는 얼마 전 결혼한 쟈키의 친구들, 그리고 동성 연애와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프랑스어는 일상 대화를 나누기에도 분명 부족한 수준이었는데, 쟈키는 내가 이야기하는 걸 들어주고 도와주었고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의견을 나누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걸어다니다가 지치면 노란색 조명이 켜진 아무 카페의 테라스 자리에 앉아 오이가 들어간 진토닉 같은 음료를 마셨다. 밤이 어두워질수록 거리는 한산해졌지만, 둘 사이의 대화는 마르지 않았다. 새벽 두시쯤. 이미 에펠탑의 불은 꺼지고 더 이상 의자를 내려 놓은 카페가 하나 없을 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쟈키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에어비앤비 앞으로 발을 돌렸다. 그리고 숙소 앞에 도착해서도 헤어지는 게 아쉬워 낮은 가로등 불빛 밑에서 또 한동안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럽 여행의 낭만이라고 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비포 선라이즈다. 미국인 제시와 프랑스인 셀린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 날 하루 비엔나의 밤을 함께 걸어다니며 사랑에 빠진다. 다음 날 기차역에서 다시 헤어지며 둘은 6개월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 날 쟈키와 함께 걸은 파리의 밤은 마치 비포 선라이즈같았다. 어디에서든 결국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됐으리라 생각하지만, 파리의 아름다웠던 야경은 우리의 추억에 설렘을 더해주었고, 우리를 힘들게 할 프랑스와 한국 사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게다가 파리의 밤공기가 준 용기는 영화보다 더 강력했다. 서로를 향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는 데 9년이 걸린 제시와 셀린과 달리. 우리는 그해 가을, 그리고 겨울 서로를 다시 만나 지금까지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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