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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디 Jul 24. 2023

눈물을 참던 기차역



MBA 끝에 인턴으로 몸을 담았던 회사는 불행히도 나의 MBA 경험 중 가장 안 좋은 기억이 되었다. 프랑스 시가총액 상위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으로 연봉도 복지도 훌륭했지만, 팀 바이 팀, 사람 바이 사람은 글로벌 사이언스였다. 문제는 나를 뽑고 나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내 매니저였다.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언행과 감정적인 태도 때문에 나는 늘 내 물잔의 절반이 넘게 스트레스를 채워 놓고 있었다. 인턴이 끝나고 얼마 뒤, 함께 3일을 근무했던 나의 후임이 “상사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게 나만 느끼는 거니?”라고 조심스러운 문자가 왔던 것만으로도 이 사람에 대한 설명은 충분할 것 같다.

아무튼, 유독 그 날은 그 상사가 나를 더더욱 힘들게 했다. 이미 오전에 글씨 사이즈, 줄 간격 같은 일 지적하며 사람 깎아내리기, 점심 시간에 프랑스어로만 말하기 등등 왠만한 괴롭힘은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오후 3, 4시쯤 다시 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팀원들이 ‘그냥 100% 시키는 대로 해야 탈이 없다.’고 조언을 해줄 만큼, 다른 의견이나 생각에 닫혀 있는 사람이었다. 그 날도 나의 생각 회로는 최대한 닫고 코멘트 대로 수정을 했는데, 뜬금없이 왜 생각을 안하냐, 너는 내가 시키는 것만 하는 거냐 등 비아냥어린 언사가 쏟아졌다.



그 날 나에게 남은 동력이라고는 어서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기차 세 개를 타야 하는 출퇴근길을 통해 배운 점이 있다면 기차가 시간표 대로 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었다. 출근 길, 기차역에 사람이 좀 적다 싶은 날이면 백발 백중 내가 타는 아침 7시 47분 기차는 취소되고 없었다. 초반에는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기차역에 나타나지 않는걸까’ 하고 감탄하다가, 어느샌가 구글 맵이 아닌 프랑스 대중교통 앱으로 실시간 도착 정보를 확인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습득했다. 

나는 휴에이말메종이라는, 회사들이 모여 있는 파리 근교 도시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 라데팡스로, 거기서 다시 다른 기차를 타고 베르사이유로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내가 사는 곳까지 퇴근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집이 기차역과 가까워서 빨리 가면 한시간 안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중간에 기차가 지각하거나 기차를 놓쳐 환승 시간이 꼬이면 한시간 반도 쉽게 걸리곤 했다. 그 때문에 매일 퇴근하기 전에 그 날 ‘최소의 대기 시간’을 보장하는 퇴근 시간을 미리미리 확인하고 나오는 것이다. 

5시 15분. 나는 그 날의 최적 환승 루트인 5시 29분 기차를 타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 이 날 있었던 유일한 행운은 퇴근할 때, 내 매니저가 자리에 없어서 인사를 안 해도 됐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온우주가 합심하여 나를 시험대에 올려 놓은 것 같았다. 우선, 휴에이말메종의 첫번째 기차부터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질 않았다. 여기서 시간이 지체되면 나머지 두 기차들도 같이 시간이 꼬이기 때문에 나는 금세 초조해졌다. 프랑스 기차가 늦는 건, 서울 버스가 출퇴근 시간에 사고가 나 막히는 날의 1.5배쯤 더 답답하다. 전광판의 숫자는 5분, 6분쯤에서 멈추어 바뀌지 않고, 기차역에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지연인데 ‘곧’ 도착할 거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한 10분쯤 기다리면 전광판 숫자가 줄어드는 경우도 있고 운이 좋지 않으면 기차가 취소되어 없어지기도 한다. 

라데팡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내가 타려던 기차는 떠났기에, 나는 천천히 걸어 베르사이유행 기차의 승강장으로 향했다. 다음 기차는 10여 분이 남아있었다. 그 사이 집 근처까지 가는 다른 기차가 왔지만, 그 기차를 타면 버스로 환승을 해야 했다. 버스는 기차보다 더 도착 시간이 불확실해 망설이다가 결국 그 기차를 보냈다. 그리고 핸드폰을 보며 간간히 전광판의 숫자를 확인한 지 5분쯤 지났을까. 전광판 맨 위에 있던 기차가 어느 새 사라지고 그 아래에 있던 기차가 올라오면서 소요시간이 다시 20 여분으로 바뀌었다. 기차가 또 취소된 것이다.



그 날은, 그냥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걸 넘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회사에 이상한 사람 있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그런 사람이 내 상사인 것도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온갖 핑계를 대며 매일 같이 늦어대는 대중교통은 프랑스에만 있는 일이었다. 돌연 취소된 두번째 기차는 결국 나를 역치에 다다르게 했고,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들이 서럽게 터졌다. 정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프랑스 기차에 욕이 절로 나왔고,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와서 하루 종일 수모를 당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처량했다. 진작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이렇게까지 스트레스 받으며 다니고 있는 것도 서러웠고, 그렇게 집에 빨리 가고 싶었는데 아까 다른 기차나 탈 걸 기다리다 바보가 된 것도 서러웠다. 


몇 년 전, 프랑스에 여행을 왔을 때 경험을 바탕으로 기다림의 미학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예고 없이 발생하는 기차의 지연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면 즐겁게 시간이 가더라 하는 내용이었다. 행복은 마음 가짐의 몫이라지만, 마음 가짐 또한 다분히 행복의 몫이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내가 행복할 때에 생겨날 수 있으니까.

그저 햇살 좋은 오후, 좋아하는 사람과 노닥거림이었던 시간이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하루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그런 불행한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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