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책 제목 짓기는 원래 9월 첫 회의의 안건이었는데, 5명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서 결국 다음 회의 때에 정하자! 라는 결론과 함께 뒤로 미루어졌다. 어떤 의견이든 3명 정도가 마음에 들면 2명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대다수가 반대하는 의견들도 있었다. 웬만하면 ‘좋아!’를 외치는 친구들이지만, 제목 짓기만큼은 다들 자기 생각을 쉬이 내려놓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무언가/누군가의 이름을 정하는 건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다.
특히 나의 하나뿐인 조카의 이름을 정할 때는 몇 달을 토론과 갈등 그 사이 어딘가에서 보냈다. 사람의 이름은 자고로 부르기 쉬어야 하고, 그러나 너무 흔해서는 안 되고, 성(姓)과 잘 붙어야 하고, 의미가 좋아야 하고, (비록 다들 교회를 다니나) 사주팔자도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워낙 고려 요소들이 많으니, 언니가 고심해서 가져온 이름에도 “그런데 그건 의미가 별로다.”, “그런데 그 이름은 너무 흔하지 않아?”, “그런데 그 이름은…” 하면서 늘 좀 더 나은 이름을 위한 ‘그런데’가 붙었다.
마찬가지로 책 제목을 정할 때도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았다. 책의 정체성이나 성격이 잘 나타나야 했고, 너무 생경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어야 했다. 게다가 우리는 유명한 작가들도 아니고 이북 특성상 매대에서 사람들이 펼쳐보며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제목은 독자들의 ‘클릭을 유도할 만큼’ 쉽고 재미있는 것이어야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회의에서 나왔던 제목들은 우리의 웹진인 <청춘양식>에서 파생된 것들이 많았다. 웹진뿐만 아니라 나중에 <청춘양식>으로 회사나 식당을 만들자고 이야기할 만큼 우리에게는 애착이 많은 이름이라서 그런지, 우리의 아이디어는 자꾸 <청춘양식>으로 돌아왔다. <청춘양식>은 청춘의 때에 있는 사람들에게 양식이 되는 콘텐츠를 만들자는 의미가 있다. ‘청춘’과 ‘양식’은 흔한 단어이지만 둘의 조합은 흔하지 않아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울림이 있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제목으로 ‘청춘’이나 ‘청춘양식’이 들어가니 제목만으로는 내용 파악이 어렵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책의 제목이 나와야 표지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으므로, 우리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12월 초에는 제목이 나와야 했다. 세 번째 회의인 12월 3일까지는 무조건 제목을 하나씩 생각해 와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졌지만, 나의 생각은 여전히 비슷한 맥락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섯 명의 사람’과 ‘생각’이라는 단어를 기계적으로 조합해서 이것저것 만들어 본 것이 내 크리에이티브의 한계였다. 다들 고민만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는지, 미리 본인이 생각한 제목을 익명으로 적어 놓기로 한 공유 문서도 이전 회의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모두 마음에 드는 제목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줌 미팅을 열었는데, 방송계에 종사하는 친구가 요즘 에세이집에 잘 맞는 트렌디한 제목을 가져왔으니 기대하라며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공유 문서에 올렸냐고 묻자 거기 미리 올려놓아야 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친구가 실명제로 불러준 제목은 ‘게으르지만 생각하며 살고 싶어’였다. 늘 의견이 분분했던 다른 제목들과 달리, 처음으로 이 제목에 모두 ‘좋다!’ 하는 반응이 왔다. 출, 퇴근길이나 자기 전 짧은 영상들로 시간을 때우는 대신 읽을 수 있는, 생각할 거리가 있는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우리의 기획 의도가 녹아 들어간 제목이었다.
우리의 논의는 자연스레 이 제목을 어떻게 더 발전시킬 수 있을 하는 방향으로 흘렀고, 다 같이 의견을 나누고 투표를 거친 끝에 <유튜브도 좋지만 가끔은 생각하며 살고 싶어>를 최종 제목으로 낙찰했다. (그리고 이 책은 -별일이 없다면- 1월 30일에 출간된다!) 우리 스스로가 침대에 누워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넘기며 시간을 보내다가 자괴감을 느낄 때가 이 책의 모티브가 되었는데, 그런 구체적인 경험이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담긴 제목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 너무도 유명한 시 구절의 의미를 나는 황당하게도 책의 제목을 붙이면서 깨닫았다. 제목을 짓고 나니 표지에 필요한 일러스트가 보였고, 책 소개글의 방향도 더 선명해졌다. 친구들과 회의를 위해 작성했던 기획서는 책의 제목을 짓는 기초가 되었고, 또 그렇게 지어진 책 제목은 각기 각색의 서른다섯 에세이를 예쁘게 묶어 꽃다발로 만들어주었다.
책을 만드는 전 과정이 감사하고 즐거웠지만, 특히 나는 이 제목을 정하게 된 과정이 참 좋았다. 나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과 오랜 시간 함께 고민하며 서로의 의견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회사였더라면 이미 몇 번의 위기를 사회적 표정으로 간신히 넘겼을 텐데, 좋아하는 친구들과 좋아하는 작업을 해서인지 그 오랜 토론의 시간에도 마음 상하는 일이 없었다.
예전에 자그마한 광고대행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대행사 대표님이 80에서 멈춘 것과 120까지 갔다가 80으로 돌아온 건 차이가 나타난다는 말씀하신 일이 있다. 결과가 비슷해 보이더라도 시간과 노력을 더 쏟으면 그 고민의 흔적이 어난다는 의미였다. 사실 나에게 우리의 제목은 120이다. 그렇지만 그게 무언가 다른 기준으로 80의 평가를 받더라도, 120에 다녀온 80이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80은 분명 다른 80들과 차이를 드러낼 것이라고 믿는다.
이 브런치북은 5명의 친구들이 함께 5개월간
이북 <유튜브도 좋지만 가끔은 생각하며 살고 싶어>를 만든 여정을 담았습니다.
이북과 브런치북에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려요!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6313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