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5. 08.
잘 지내시나요?
우리의 인연이 끝난 지 벌써 5년이 되었네요
사실은 조금 당신이 희미해졌습니다.
5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당신이 저를 찾지 못하게 연락처를 바꿔버려서 저 또한 당신의 근황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아니, 솔직히 고백드리면 며칠 전 친구에게 당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당신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전달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제외되어 있던 가족사진을 모두 삭제했더군요 아마도 저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랬겠지요?
그러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당신은 저한테 너무 많은 걸 주었거든요 당신은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저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마음을 졸였겠지요 덕분에 저는 온전한 인간이 되어 지금은 건강한 두 다리로 세상을 힘차게 걸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 아들 열 명보다 더 힘들게 키웠다고 이야기했지요? 지금은 그 말씀에 뼈저리게 공감이 됩니다. 당신이 저에게 완전히 양육권을 양도한 뒤 제가 저를 직접 키워보니 변덕도 심하고 제멋대로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고집불통 망아지였습니다.
그동안 꾸준하고 집요하게 당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젠 당신을 찾아가 사과드릴 수 없습니다. 저에게 당신은 다시는 꺼내볼 수 없는 너무나 아픈 존재라서요 전할 수 없는 이 편지조차도 용기 내어 쓰지만 서론부터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숨을 쉬기 힘드네요 혹시 당신에게도 제가 이런 존재일까요?
저는 당신 덕분에 버릇없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라는 그늘이 없었다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취약 계층의 존재라는 걸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겠지요 제가 아무리 속을 썩여도 당신은 제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비밀을 지켜냈습니다. 덕분에 저는 기죽지 않고 세상과 맞서는 강단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저도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해서 한치의 양보가 없었지요 그렇게 오래 함께 살아도 둘이 있으면 어색한 공기가 흘렀습니다. 퇴근하고 장대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는 지하철역에 내려서 당신에게 우산을 가져와달라는 부탁을 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비를 쫄딱 맞으며 집에 왔습니다. 당신도 저처럼 이렇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이 참 많았겠지요?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어긋났는지 5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아침 샤워를 하는 시간에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는 당신에게 못되게 군 제 자신이 너무 죄스러웠습니다. 다른 자식들과 다르게 왜 혼자서만 방황하고 삐딱선을 타 왔는지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몇 년 후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당신이 원망스러워졌습니다. 그동안 미운 오리 새끼처럼 가족들 사이에서 적응을 못하고 혼자 방황했던 이유는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당신과 이미 애착관계가 형성이 되지 못해서 그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독한 회피형 애착으로 자라났습니다.
다시 몇 년이 더 지나니 당신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그 당시 저보다 어린 나이였네요 그 시절에 입양이라는 큰 결심을 하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낯선 아이를 최선을 다해 품었다는 게 정말 대견합니다. 저는 그때의 당신보다 언니지만 지금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제가 가족이 된 지 4년 만에 인공수정의 기적으로 당신에게 배 아파 낳은 자식이 둘이나 생겼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저까지 챙겨야 하니 어설플 수밖에 없었겠네요 당신도 엄마가 처음이니까요 비로소 저는 당신과 저를 둘 다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5년 전 늦은 밤 당신과 다투다 울면서 영원한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는데 구두를 두고 갔으니 찾아가라고 당신에게 연락이 와서 다음날 다시 본가로 갔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찾아온 그 집엔 맛있는 불고기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가족들의 식사가 모두 끝나고 어지럽혀진 식탁을 힐끔 쳐다보자 당신은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새로 차려 줄 테니 밥을 먹고 가라고 했습니다.
저도 당신도 그게 마지막 밥상인 줄 알고 있었지요 다신은 먹지 못할 당신 해준 밥상을 어렵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서려는 데 당신은 저를 붙잡고 그동안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죠 2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사과였습니다. 수많은 시간 동안 당신 마음속에서 꺼내지 못했던 말이었지요? 용기 내어 말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세상에 온전히 혼자 남겨지니 서러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가해자들은 가족들이 와서 의기투합하지만 저는 부를 보호자가 아무도 없더군요 식중독에 걸린 날엔 몇 시간이고 방 안에서 배를 잡고 뒹굴었지만 핸드폰 찾을 힘이 없어서 병원에 갈 수 없었습니다. 예전엔 그렇게 번거롭고 귀찮던 명절이 한 해중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날이 돼버렸습니다.
그래도 제가 혼자 남겨진 게 정말 다행입니다. 당신을 떠올리면 걱정이 되지 않거든요 저보다 능력 좋은 쌍둥이 동생들이 당신을 살뜰히 보살펴주니 마음의 짐이 훨씬 가볍습니다. 대신 그 무거운 짐들을 당신이 지고 있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당신과 저는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닮았습니다.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제가 받으면 당신인 줄 알고 사람들이 착각하는 일들이 많았지요 어릴 땐 이 저음의 무거운 목소리가 싫었지만 요즘은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을 많이 듣습니다. 낮지만 신뢰 가는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가 이젠 저도 좋습니다. 목소리와 함께 원망스러웠던 당신도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당신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고작 편지 한 통에도 심장은 끊임없이 피를 쏟아 내는데 당신과 얼굴을 마주하면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아직은 용기가 나질 않습니다.
오늘 편의점에 가보니 가판에 카네이션이 가득 피어있네요 5년이란 시간 동안 드리지 못한 다섯 송이의 카네이션 대신 집으로 돌아와 용기 없는 편지를 씁니다.
그동안 저의 인생에 가족을 선물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마음의 짐은 내려놓으시고 행복하세요 제가 없는 가족사진도 다시 올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원래 당연히 누려야 했던 당신의 삶이니까요
부디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2021. 05. 08
당신의 큰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