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이 과잉 분비되는 도파민형 인간의 고뇌
"너는 원하던 걸 이루면 그걸 즐기기도 전에 금방 또 새로운 걸 찾더라?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아"
전 애인 K가 나를 보며 자주 했던 말이었다.
"매일 똑같은 인생은 답답하지 않아? 사람이 욕심이 있어야지"
나는 K에게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나는 매일 똑같이 살아도 현재에 만족해서 행복해"
그럼 K는 이렇게 대답한다.
매일 똑같이 살아도 행복하다니..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K의 인생관이었다.
우리는 다섯 시간 넘게 전화를 해도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개그 코드도 똑같아서 동시에 배꼽을 잡고 쓰러지는 커플이었지만 유일하게 이 부분으로 자주 충돌하곤 했었는데
현재의 시점에서 살아가는 K는 항상 미래의 시점에서 살고 있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은 매일 퇴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나눠 먹는 거야"
K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숨이 막혀왔다.
[매일 퇴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저녁 =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 으로 느껴져 숨 막혔던 거였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도 행복하지만 이 지구는 이루고 싶고 가지고 싶고 반짝거리는 새로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오직 사랑만을 위한 인생은 나에겐 지루했다.
K와 헤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여전하다. 몸은 현재에 머무르고 있는데 정신은 온통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미래에서 살고 있다.
가끔은 이 괴리감이 우울감으로 번질 때가 있는데 과거에는 여행으로 해소했던 것 같다.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새로운 장소라도 가야 했으니까
문제는 나이가 드니 여행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일시적인 새로움은 더 이상 자극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젠 실질적인 인생의 성과들이 더 강한 만족을 준다.
인생의 성과는 여행처럼 항공권만 끊으면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해소하기 더 어려워졌다. 나는 고심 끝에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냈고 명상을 습관화하니 현재와 미래의 괴리감에서 벗어나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북미 행동과학 분야의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는 대니얼 Z. 리버먼 교수가 집필한 "도파민형 인간"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 그동안 알 수 없었던 나의 행동들이 모두 설명되었다.
도파민은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이렇게 네 종류의 원소로만 이루어진 조그만 분자이지만 이 호르몬이 쥐고 있는 것은 인간 행동의 비밀 그 이상이다.
세상에는 날 때부터 도파민이 남들보다 많이 분비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이른바 '도파민형 인간'이라고 부른다. 더 많은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놀라운 것에 끊임없이 매료되는 사람들이다.
도파민은 현재의 소유물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도파민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미래에 더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도파민의 인생관은 그저 '무조건 더!' 다. 그런 의미에서 도파민은 쾌락 분자가 아니다 '기대감 분자'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가 꿈과 환상만을 좇는 것을 멈추고 현실을 즐길 수 있으려면 '미래 바라기' 도파민이 쥐고 있던 뇌의 지배권이 다른 신경전달물질들에게 넘어가야 한다. 도파민과 반대되는 현재 지향적 화학물질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로토닌, 옥시토신, 엔도르핀 등이 있다.
- 저서 "도파민형 인간" 中 -
놀랍게도 K와 내가 그토록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호르몬의 충돌이었던 거다.
나는 뇌에 미래 지향적 화학물질로 가득 찬 도파민형 인간이었고 K는 현재 지향적 화학물질로 가득 찬 세로토닌 인간이었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호르몬 때문에 대화 코드와 웃음 코드가 똑 닮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서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나는 날 때부터 도파민형 인간이었다고 추측되는데 인생에서 자주 경험하는 도파민이 과다 분비된 상태를 설명하자면 마치 고집 센 어린아이를 속에 숨기고 사는 기분이다.
"빨리 거길 가고 싶어!!! 지금 당장 가고 싶다고!!!"
"한방에 끝내버리고 싶어!!! 오래 걸리는 거 싫어!!!"
"무슨 맛인지 궁금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그걸 꼭 먹어야겠어!!!"
"이건 해냈으니까 됐고 다음 꺼 내놔!!!"
도파민은 지금 당장 새로운 자극을 내놓으라고 한껏 때를 쓰기 시작한다. 그럼 회사가 키워놓은 사회성이 날뛰는 도파민을 어르고 달래서 진정시킨다.
"그만! 어른스럽게 행동해! 인내해야 결과를 얻는 거 알고 있잖아"
다행히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도파민들은 수년간 회사에 갇혀서 봉인되었다. 덕분에 괴짜스러운 행동들은 정밀하게 세공되어 이젠 누가 봐도 멀쩡한 사회인이 되었다. 보수적인 집단에서 20대를 보낸 건 정말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몇 살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아주아주 어린 시절,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괴상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이웃집을 방문했는데 그 집 거실에는 정리되지 않은 이부자리가 있었고 이불 한가운데가 볼록하게 솟아 있었는데 이상한 점은 이불 밖으로 사람의 머리나 손, 발 같은 신체 부위가 아무것도 나와있지 않았다.
"여기 사람 있어요?"
나는 이불 더미를 가리키며 할머니께 물었다.
"응 할아버지가 주무시고 계셔"
할머니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할머니의 말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보통 어른들은 키가 크기 때문에 이불 밖으로 발이나 얼굴이 나와있어야 하는데 이 이불 더미는 아무것도 삐져나와있지 않고 볼록하게 솟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이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정말 할아버지가 저 이불속에 있을까? 아닌 것 같아! 궁금해.. 궁금해 미치겠어.. 당장 확인하고 싶어! 할머니가 거짓말한 것 같아 저건 그냥 이불 더미 일 거야"
나는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불 더미 위로 뛰어들었다.
"아이고!!!!!"
이윽고 할아버지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날 한참 동안 혼났던 기억이 있다.
어린아이의 눈에 볼록 튀어나온 이불 더미는 예측 불가한 대상이었던 거다. 예측 불가한 일은 도파민에 불을 지핀 거고 그땐 사회성이 장착되기 전이라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주무시고 계시는 할아버지 위로 뛰어올랐다.
이것 말고도 연못 위에 떠있는 수련 잎에 올라가면 나도 뜰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밟고 올라갔다가 연못에 빠져서 한바탕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이 장면은 홈비디오에도 찍혔는데 카메라가 급하게 꺼졌다가. 다음 장면은 나를 건져낸 아빠가 모닥불에 엉덩이를 말리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또 어떤 날은 월트 디즈니 "백설공주"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백설공주가 딸기 파이를 만드는 장면을 보고는 부모님께 당장 저 파이를 내 앞으로 대령하라고 하루 종일 울며 떼를 쓴 적도 있었다. 결국 부모님은 온 동네 빵집을 뒤져 피칸파이를 찾아와 내 손에 쥐여주고 나서야 나는 울음을 그쳤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미래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 엉뚱한 곳에서 도파민의 에너지가 방출된 것 같다.
정체 모를 이불 더미, 물에 떠있는 수련들, 백설공주가 만드는 파이는 나에겐 미지의 세계였고 그에 대한 갈망은 괴짜스러운 행동들로 발현되었다. 뚜드려 맞아도 연못에 빠져도 나는 그것들을 꼭 알아야만 했다.
이젠 어른이 된 나에게 예측할 수 없는 건 미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의 도파민들은 자꾸만 미래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세로토닌 인간 K는 이런 내가 불행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현재 시점에서 만족할 줄 아는 세로토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는 도파민들을 보며 가엾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도파민들을 대표하는 도파민형 인간으로써 우릴 가엾고 무모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에게 도파민이 없었다면 현대의 과학은 이렇게 발전할 수도 없었고 인류는 이 정도로 번영하지 못했을 거다.
열정과 설레임,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사는 건 우리 도파민 인간들에겐 행복한 일이다. 가끔 너무 과해지면 명상 한번 때리면 된다ㅋㅋ
각설하고
인간의 행동이 화학물질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니 문득 사랑에 미쳐있었던 지난날들이 궁금해졌다.
그의 속마음이 궁금해 잠 못 이루던 사랑은
백설 공주의 딸기 파이를 갈망하던 도파민이었을까?
그의 확답이 듣고 싶어 무작정 공항까지 달려갔던 사랑은
이불 더미 위로 뛰어들게 만들었던 도파민이었을까?
그를 사랑했던 걸까?
그의 알 수 없는 속마음을 갈망했던 걸까?
사랑일까?
도파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