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라는 잔고가 넘치는 사람들

젊음의 빛이 일렁대는 대학가의 밤

by 손서율


밤 9:50분

집 앞 하천에서 가벼운 조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른다.


무설탕 그릭요거트, 유기농 야채, 동물복지 달걀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다 말고 캐셔에게 말했다.


"잠시만요 뭐 좀 가져올게요"


주류 코너로 가서 4개 묶음 단위로 할인하고 있는 500ml 맥주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며 고민하다 소심하게 두 캔만 집어서 계산대로 가져온다.


"이것도 함께 계산해 주세요"


약속도 없는 날인데 쓸데없이 간을 쓰는 건 비효율적이지만 그래도 오늘 밤은 시원한 맥주가 정말 간절하다.


5일 만에 심사숙고해서 맥주 두 캔을 내 몸에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운동복을 입고 한 손에는 장본 것들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술집 테라스 위에 노란 조명들이 일렁거리고 젊은 남녀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소주를 기울인다.


거리에는 이제 막 민짜 티를 벗은 대학생들이 동그랗게 둘러 모여 담배를 피운다.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이 모락모락 피워내는 매캐한 저녁연기들


코시국에 거의 볼 수 없었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훈남훈녀를 보면

술자리 고전 멘트 "아이스크림 사러 같이 갈래?"는 요즘 시대에도 남아 있나 보다.


"와 재밌겠다..."

일렁일렁 모락모락 하하호호

매일 밤이 활기찬 이곳, 나는 대학가에 산다.




집으로 들어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맥주 한 캔을 유리잔에 가득 담아 창가 앞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9층에서 보는 노란 불빛들과 활기찬 사람들.

맥주잔을 들어 유리잔 속에서 일렁거리는 불빛들을 들여다본다.


일렁일렁 일렁일렁

영원히 반짝거릴 것 만 같은 젊음의 빛

그 속엔 삶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내일이라는 잔고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시간은 영원했고

부여받은 지 얼마 안 된 새 몸은 아무렇게나 다뤄도 끄떡없던 날들


인생이라는 월급을 탄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 골목에서

그들은 시간과 건강이라는 재화를 오늘 밤 마음껏 플렉스 한다.




홀로 9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나는 그 빛에서 조금 멀어졌다.


5년 뒤면 마흔이라니 벌써 인생이라는 월급을 1/3 정도 써버렸다. 이젠 남은 2/3의 월급으로 삶이 끝날 때까지 잘 추려나가야 한다.


더 이상 시간도, 건강도 내키는 대로 마음껏 쓸 수 없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선선한 밤공기가 집안을 가득 메우고 맥주 한 잔에 온몸이 노곤 노곤해졌다.


그때 친한 동생에게서 카톡이 온다.

"금요일인데 뭐해? 술 한잔할래?"

"아니 담에 봐"


남은 맥주를 한입에 탁 털어 넣고 냉장고를 열어 두 번째 캔을 꺼내려다 도로 다시 넣어놓았다.


창가에 놓인 의자도 번쩍 들어 도로 노트북 앞으로 가져와 앉았다.




갑자기 스무 살의 새벽이 떠올랐다.


밤새 홍대 클럽에서 신나게 흔들다 나온 밤거리는 온통 우리 또래 사람들뿐이었다.


나이 든 사람들은 모두 사라진 시간..


벤치에 앉아 아픈 구두는 벗어버리고 생각했다.

"왜 나이 들면 다들 재미없게 살까? 난 늙어도 신나게 놀면서 살 거야"


그랬던 나도 별수 없이 재미없는 어른이 돼버렸다.


그렇게 스스로 어른이 돼버렸다.










이전 13화카톡 변태의 정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