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했던'오픈런'을 직접 하게 된 사연
"지나가다 보이면 무조건 다 사와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내가 파리에 간다고 하니 공주님은 눈을 반짝이며 명품이 빼곡히 적힌 바잉 리스트를 건넸다. '공주님'은 4년 만난 애인이었는데 그는 슬리퍼 하나도 명품으로 사야 하는 명품광이었다.
같이 여행을 가면 함께 해변을 걷자 해도 본인 신발에 모래가 묻는 게 싫어서 혼자 다녀오라고 하는 유난스러운 남자였다. 나는 그를 평소에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사고 싶은 게 뭐 그리 많은지 리스트만 봐도 눈이 피로해졌다. 힘닿는 데로 사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막상 파리에 도착하니 낮에는 그림을 보러 다니고 밤에는 와인 마시느라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모든 걸 눈에 담기도 바쁜데 한가롭게 쇼핑이나 할 시간은 없었다.
여행이 막바지로 다가오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의 빼곡한 바잉 리스트 중에 단 한 개도 사놓은 게 없었다. 이건 무조건 사 오라고 신신당부한 스니커즈가 있었는데 그거 하나라도 사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출국 3일 전 샹젤리제 명품거리의 발렌시아가 매장으로 찾아가서 직원에게 스니커즈 사진을 보여줬더니 이건 아직 출시 전인 모델이라 이틀 뒤 근처에 또 다른 매장이 새로 오픈하는데 그때 구입이 가능하다고 했다.
파리에서도 아직 출시가 안된 신상을 어떻게 안 건지 공주님의 정보력은 대단히 피곤했다.
매장 오픈날, 걱정되는 마음에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눈앞에 진 풍경이 벌어졌다. 이미 매장 앞은 기나긴 줄로 인산인해였고 그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동양인이었다. 파리에 꽤 오래 머물렀지만 동양인을 은근 찾기 힘들어서 다들 어디에 있나 했더니 모두 거기 모여있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기나긴 줄의 맨 뒤로 가서 섰다. 오픈 시간이 되자 매장 문이 열리면서 덩치 좋은 보디가드를 양옆에 낀 우아한 프렌치들이 나왔다. 길에 널브러져 기다리던 동양인들은 우르르 입구 앞으로 몰려와 서로 부대끼며 웅성거렸다. 마치 전지전능한 프렌치의 문명을 받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였다.
그들은 우아한 손짓으로 진정시키더니 흐트러진 줄을 가지런히 세웠다. 분명 우리가 돈을 내는 고객인데 마치 홈리스들에게 무료 배식을 하기 전에 질서 있게 줄을 세우는 듯한 그림이었다.
그날은 가을의 이른 아침이라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그들이 에스프레소 크기의 작은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 나눠주는데 몇백만 원짜리 물건을 사러 온 호갱님들은 추위에 벌벌 떨면서 황송해하며 홈리스처럼 받아마셨다. 아무리 다시 봐도 정말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이 상황이 개탄스러우면서도 스니커즈는 사수해야 했고 당장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가도 지금껏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발이 떨어지질 않아 장장 2시간 30분을 오기로 버텨 결국 스니커즈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그곳을 벗어난 후에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한참 동안 현타가 왔다.
한국에 돌아와서야 왜 그렇게 다들 추위에 떨면서 몇 시간이고 기다렸는지 알게 되었다.
한화로 85만 원 정도에 샀던 스니커즈는 국내에서는 더 구하기 힘든 모델이라 160만 원대에 팔리고 있었다. 나는 2시간 30분을 기다려서 80만 원을 번 셈이다. 그때 함께 기다렸던 바이어들처럼 신발을 여러 개 샀다면? 직업을 바꿔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무튼 나는 공주님의 신발을 사수하기 위한 흑기사 노릇만 하다 왔으니 이런 수모를 다신 겪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이런 수모를 다시 겪게 될 줄 몰랐다.
나는 명품 백을 살 때 지불하는 금액이 워낙 크다 보니 가방을 멘 순간 팔에 착 감기면서 운명(?)이라는 느낌을 받아야 구입하는데 지난 몇 년 간 나의 운명의 백은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한 달 전 내 어깨가 원래부터 자기 자리였던 것처럼 착 감기는 운명의 백을 만났는데 안타깝게도 재고가 없었다. 구매 대행으로도 오래전부터 구하지 못한 모델이라 아쉽지만 백화점 웨이팅 리스트라도 적어두고 나왔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고 회사에서 예고 없던 코로나 위로금 100만 원이 입금되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웨이팅 걸어 놓았던 가방 재고가 소량 입고되었다고 백화점에서 문자가 왔다 마치 가방 사는데 보태 쓰라고 준 돈 같았다. 역시 나의 운명의 백이었다.
백화점에서 보낸 문자 메시지는 선착순 판매로 진행되고 오전 중으로 품절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모델은 웨이팅 리스트 대기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서 고민 끝에 급하게 다음날 오전 반차를 냈다.
am10:30 백화점 오픈이지만 나름 준비성이 철저한 나는 혹시 모르니 50분 전에 도착했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건가 생각했던 잠잠한 로비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믿기지 않는 장면이 펼쳐졌다.
이미 사람들은 바글바글했고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새벽 6시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가방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돗자리를 챙겨 오는 발상도 놀라웠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를 못 나가니 백화점으로 인파가 몰린 거였다. 내가 도착한 곳은 오픈런 스팟이었는데 뉴스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해왔던 오픈런을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픈 5분 전을 알리는 백화점 안내방송과 노랫소리가 들리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들 오픈런 출발선인 철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출발선에는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남자들이 어디서 나타난 건지 첫 줄은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비겁하게 남친 찬스를 쓰다니.. 남자 친구 없는 것도 서러운데 가방 하나 사겠다고 하이힐을 신고 남자들과 달리기 시합을 하게 생겼다.
"에이 설마 다들 살살 뛰겠지.. 난 우아하게 경보할 거야"
철문이 스르르 올라가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전속력으로 뛰었다. 우아한 경보는 무슨.. 나의 황금 같은 반차를 헛되이 쓸 수 없었다. 학교 체육대회든 회사 야유회든 계주를 하면 나는 항상 마지막 주자로 우리 팀 역전의 히든카드였는데 그날은 하이힐을 신은 채로 그녀들이 대신 보낸 건장한 아바타들을 이길 순 없었다. 근 일 년 동안 가장 빠르게 뛰었는데도 7등이었다.
줄을 선 상태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샹젤리제에서 느낀 현타가 다시 끔 찾아왔다.
다시는 이런 수모를 겪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해놓고 결국 나는 또 프렌치들의 마케팅의 노예가 되어 반차까지 내고 시키지도 않은 달리기 시합을 하다니 뉴스에 나오는 오픈런 장면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해놓고 내가 그 속에 들어가 같이 뛰고 있었다는 게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이런 모순적인 인간이 또 있을까?
그 와중에 결국 7번째 마지막 재고를 차지했다.
"나는 모순적인 넘버 세븐 럭키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