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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Nov 15. 2022

화면조정 시간  

친구의 마지막 일기를 7년 만에 이해했다  


"우울해요"

"무슨 일이야?"


처음으로 우울하다는 말을 꺼냈더니 그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글이 안 써져요"

"열심히 하면 되잖아 어서해"

"열심히 한다고 써지는 게 아니에요"


나에게 글은 "열심히"라는 단어와는 상관없는 영역이었다.


글이 나오지 않을 때는 한참을 자리에 앉아 펜대를 굴려봐도 소용이 없다. 그럴 시간에 집 앞 하천으로 나가 흐르는 물과 나무와 숲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침묵하던 마음이 슬그머니 다시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저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다 글로 옮겨 적기만 하면 되었는데


요즘 나의 마음은 온통 고운 색들로 뒤덮인 만추의 숲에서 호사스러운 산책을 시켜줘도 감감무소식이다.




갑자기 7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 Y가 마지막으로 남긴 일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무탈하다는 긍정의 표현이고,  
텅 비었다는 부정의 표현이다.

요즘 나의 상태는
무탈하다고 하기엔 그냥 無에 가깝고,  
텅 비었다고 하기엔 외롭지는 않다.


당시,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문장들을 7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는데


나의 상상 속에 살고 있는 Y의 마지막 모습을 한 장면으로 시각화하면


그는 불 꺼진 방 한가운데 등받이가 있는 소파에 홀로 앉아있는데 그 모습이 제법 차분하고 무탈해 보인다.


그의 앞에는 낡은 아날로그 TV가 한 대 놓여있는데

화면 속에는 슬픔, 고통, 분노의 장면이 아닌, 모든 방송이 종료되고 애국가마저 끝나고 나면 삐- 소리와 함께 나타나는 백색 화면뿐이다.


나는 Y의 쓸쓸한 뒤통수 뒤에 서서 백색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무탈하기엔 無에 가까운 텅 빈 세계를..

 



나의 기쁨, 분노, 슬픔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떠한 형태의 감정이든 그건 마음이 뿜어내는 동력이자 기운찬 에너지다.


그러나 요즘 나의 마음은 Y의 일기처럼

무탈하다고 하기엔 그냥 無에 가깝고, 텅 비었다고 하기엔 외롭지는 않은데 아마도 지금은 화면 조정 시간인 듯하다.


하지만 걱정은 되지 않는다.

푸르스름한 새벽동이 방안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으니 곧 해가 뜨면 마음은 새로운 화면을 송출할 거다.


온통 백색의 화면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편안한 자세로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2015.02.13

Y의 마지막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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