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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Dec 24. 2022

피자 한판의 기적

상대를 위한 빈틈을 만들어 놓는 진짜 어른의 너그러움


"어떻게 해야 화해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 J가 내게 물었다.


이번 주 주말에 결혼 1주년을 앞두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남편이랑 각방 쓴 지 얼마나 됐는데?"

"일주일 정도?"


"집에서 마주쳐도 이야기를 아예 안 해?"

"출퇴근 시간이 달라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 각자 다른 방에서만 지내거든"


"그럼 일주일 내내 마주치지도 않고 말 한마디 하지 않은 거야?"

"응.."


J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황은 꽤 심각해 보였다.

부부의 갈등은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대화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J는 남편이 답답하고 실망스럽다고 토로했다.


"직장에서 무슨 일만 생기면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하는데 너무 실망스러워.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너무 나약한 것 같아"


"이해해, 나도 그런 이야기 들으면 실망스러울 것 같아"


"요즘 남편 일이 어려워져서 수입도 별로 없고 집에 있을 때가 많은데, 퇴근하고 오면 집안일이 아무것도 안 되어있는 거 보면 답답하고.. 그래서 잔소리를 좀 했더니 이제 내가 질린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해야 화해할 수 있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J에게 물었다.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제일 비싼데 맛있고 좋아하는 거 말이야~ 참치 좋아하려나?"


"아니? 음.. 피자! 피자를 제일 좋아해"


"피자? 가성비 좋네! 그럼 남편 퇴근해서 집에 들어올 때쯤에 피자 한판 시켜서 식탁에 세팅해 놓고 앉아있어"


"피자를 시켜놓으라고?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해?"


"같이 먹으면서 얘기 좀 하자고 하는 거지. 다짜고짜 사과하기는 어색하니 먹는 걸로 물꼬를 트는 거야"


"오! 좋은 생각이다"


"그리고 식탁에 앉으면 앉아줘서 고맙다고 먼저 이야기하고 나서 시작해. 처음부터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야 너의 말에 귀 기울이거든"


"알겠어 네 말대로 한번 해볼게"


그날 횟집에서 4시간이 넘도록 소맥을 말면서 J에게 여러 가지 처세술을 조언해 주었다.


칭찬과 화해의 기술, 기분 상하지 않게 집안일을 분담하는 방법,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상생하는 방법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다음날, 애인 K를 만나서 어제 들었던 친구의 고민에 대해 의논했는데. K는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뜻밖의 솔루션을 이야기했다.


"그럴 땐 말없이 기다려 줘야 해. 배우자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할 거야.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요?"


"응. 삼촌이 사업에 실패하시고 나서 10년 동안 방황하셨을 때, 숙모는 혼자 생계를 다 책임지면서도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셨어. 덕분에 삼촌은 다시 재개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본인이 가장 힘들었을 때 묵묵히 기다려준 숙모에게 고마워하셔"


"와.. 10년 동안이 나요?"


"10년 동안 바깥일과 집안일을 혼자 도맡아 하셨어 삼촌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주신 거지"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우리 아버지 또한 어머니가 열심히 사시는 모습을 보며 잠시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사셨고, 나도 어릴 때 방황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묵묵히 기다려 주셨던 게 감사해서 지금까지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거야"


K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는 데 초점을 둔 엄한 부모 밑에서 자라온 나는,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었다.


K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믿음을 원천으로 스스로 일어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그가 부러웠다.




지금까지의 나는, 고민을 안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문제를 더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지 조언하기 바빴다.


좀 더 분명한 목소리로, 명확하게 방법을 제시할수록 상대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정답을 찾지 못하는 이에게는 어떻게든 답을 알려주고 싶어 부단히도 애를 썼는데 이런 나의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의 눈에는 일방적이고 완강해 보일 때가 있었나 보다.


문득 전 애인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네가 하는 말은 다 맞는 말인데, 왠지 듣기가 싫어"


정답을 모르는 이에게 정답지를 가지고 와 들이미는 건 무척이나 쉽다.

보는 내가 답답하니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는 행동이니까.


그러나 집안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진 남편을 10년이라는 긴 세월 묵묵히 기다려주었다는 건


기약도 없고 조건도 없는 절대적인 믿음을 필요로 하는데 이건 부처의 수행과 다를 바 없다.


숙모가 10년간의 고된 수행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 또한 누군가에게 받았던 믿음을 원천으로 스스로 일어서 본 경험이 있었던 게 아닐까?


숙모가 삼촌에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K에게 대물림하고 있던 건


받아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절대적인 믿음과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


나는 K의 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았다.


빈틈없이 현명한 게 어른인 줄만 알았는데

현명함 속에서도 상대방을 위한 빈틈을 만들어 놓는 너그러움이 진짜 어른이었다는 사실을.




다음날 친구 J에게 카톡이 왔다.


"덕분에 남편이랑 잘 풀었어! 고마워~"


"정말 다행이다~ 피자로 화해했어?"


"응~ 남편이 피자 사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데. 내 성격에 잘못한 거 없으면 먼저 사과 안 하는데.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던 피자를 시켜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거 보고 처음에는 웃더니, 방에 들어가서는 안쓰러워 눈물 날 뻔했다고 하더라고"


"남편이 진짜 감동했을 것 같아. 괜히 나도 울컥하네"


"응, 어떻게 화해할지 고민했는데 정말 고마워!"




J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비로소 남편을 믿고 기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J와 나는 조금씩 진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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